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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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75) 하느님 뜻과의 조화 (40) 침묵하며 영적 시간 갖기

정신의 생각 내려놓고 영에 맡길 필요 있어/ 영의 초월적 시간에서 참진리 체험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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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많은 이들이 ‘불쌍하다’,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또 고통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접하면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성금을 낸다.

이때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정신적 역할 때문이 아니다. 머리로 따지고, 요모조모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마음(영)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공명, 즉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때때로 정신의 역할적 시간을 멈출 필요가 있다. 정신의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영에 맡길 필요가 있다.

정신의 역할적 시간을 정지시켜야 하는 이유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단계가 있다. 초심자의 경우에는 그냥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매일 시간을 정해 그냥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조금 수준이 높아지면 성서 신학적 지식을 쌓으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다양한 문헌 비평적 차원의 지식을 습득하면 성경은 더욱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수준이 더 높아지면 성경을 읽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적 이성적 접근을 멈추고 그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정신적 읽기를 멈추고 그 말씀의 충만함 속에 그냥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보시니 좋았다”(창세 1,7)라는 말씀 하나 가지고 우주를 온전히 묵상할 수 있다. 단어 하나 가지고 하루 종일 묵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일체가 된 것 같은 분위기를 이때 느낄 수 있다. 이때 정신적 역할은 정지된 것이다. 동서남북, 우주 안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만 남는다. 바다 속도 우주도 모두 하나가 된다. 지극히 단순해진다. 일시적 정신의 역할 멈춤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만 너무 사용하며 그 정신 안에 매몰되는 것이 문제다. 요즘 한국사회의 많은 이들이 정신 안에 매몰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초등학생도 중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성인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정신은 나 중심적, 이기적, 나 하나 잘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마음, 영이 중요하다. 마음, 영으로 들어가야 형성의 장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정신이 아닌, 초월하는 마음의 차원을 구현해 내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라. 공무원들, 회사원들, 교사들 등 마음과 영의 차원으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정신만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뉴스를 보면 인터넷 게임 중독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영의 초월적 시간이 아닌 정신의 시간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터넷, 도박, 알코올, 성(性) 중독 등은 특별한 몇몇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정신에 매몰돼 살아가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안타깝다.

유해 안치소에서 사랑하는 남편 혹은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가족을 상상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보는 가족들은 정신적 시간에서 잠시 떠나 있다. 고인을 추모하며 마음으로 운다. 영으로 운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적이고 나 자신만 생각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 일을 걱정하고, 내일 해야 할 사회적 계획들을 골몰하는 이는 드물다. 그냥 그 슬픈 상황 속에 머물며 마음으로 고인을 바라본다.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입이 다물어진다. 혼란하고 복잡한 정신의 시간이 아닌, 침묵과 명상의 영혼의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 침묵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의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하느님이 그렇게 인간을 창조해 놓으셨다. 평상시에는 이러한 영적 힘이 사용되지 않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나의 진정한 모습이다.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실 때 소중하게 심어 놓으신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 모습이 구현되면 그동안 나를 지배해 왔던 정신적 육신적 힘들이 잠시 힘을 잃는다. 평상시에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의 시신을 바라보는 자녀는 침묵 안에서 말없이 삶과 죽음의 경외로운 진리들을 체험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기에 그냥 침묵한다. 죽음에 이른 아버지의 모습에서 인간은 어떤 초월적 신비를 묵상한다.

돈벌이를 위해 땀 흘리는 것,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 타인을 비방하고 나를 앞세우는 것 등은 형성하는 신적 신비와 함께하는 공명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삶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초월적 침묵은 형성하는 신적 신비와 함께하는 침묵이다. 세상 살아가느라 지칠 대로 지친, 또 나 중심적으로 정향된 정신의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자. 그리고 영의 초월적 힘을 불러내 보자. 영의 초월적 시간만이 진정한 시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참 진리의 충만함을 체험할 수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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