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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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76) 평상시 내면 준비하며 영적 삶 살기

참된 내면을 정립하지 못한 채 시간 낭비해/ 지금부터 삶을 해석, 재정립하는 노력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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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 주위에는 한국전쟁을 체험한 어르신들이 많다. 그들이 경험했을 60년 전 상황을 상상해 보자.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험이 있었던 이들은 무조건 도망을 가야 했다. 이것저것 가재도구 챙길 틈도 없이 서둘러 집을 떠나 탈출을 해야 했다. 그때 몸 하나 쉴 수 있는 작은 집이 얼마나 소중한지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 넘게, 한 달 가까이 목욕하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피란 다니면서 살림살이도 찬찬히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 신발 하나, 양말 한 켤레, 수건 한 장이 얼마나 소중한가.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당시 피란민들은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하느님 저를 살려주세요.”

평상시 우리는 하느님을 강하게 체험하지 못한다.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덤덤하게 살아간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런 인간을 탓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무한히 인내하고 믿어주고 사랑해 주신다. 인간이 침묵을 하고, 인간이 인내한다면 얼마나 하겠는가. 무한한 침묵과 인내와 사랑은 오직 하느님, 그분의 것이다. 그런 기다림과 침묵이 있기에 인간은 희망할 수 있다. 어떤 결정적 순간에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께 다가갈 수 있다.

그 결정적 시간의 정점이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 정신의 시간은 점차 사라지고, 초월적 공명의 시간이 열린다. 이러한 초월적 체험은 내부로부터 온다. 인간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은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감각적인 것들을 우리는 대부분 정신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 영, 마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영적인 차원의 해석과 판단을 해야 한다. 문제는 죽음 등 극한 상황에서만 영적인 접근을 할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주교님에게 더 많고, 수녀님에게 더 많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영적인 접근 능력을 얼마나 발휘해 내는가 하는 데 있다.

내면이 중요하다. 평상시에 이 내면을 잘 준비해야 한다. 죽음이나 전쟁, 실직, 회사의 부도 등 극한 상황에 직면해서야 이러한 내면의 중요성을 깨달을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노력해서 하느님께서 미리 형성해 놓으신 내면을 갈고닦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셨다. 정신의 역할적 시간에만,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으로만 시간을 사용하라고 주신 시간이 아니다. 정신 역할을 초월하는 영적 차원의 공명적 차원에서 인생을 살라고 허락하신 시간이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면서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계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살았다. 참된 내면 정립의 시간을 살지 못했다. 전쟁이나 죽음 등 극한 상황에 직면하고 나서야 하느님을 찾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늦지 않았다. 차근차근 지금부터 오늘 하루의 삶, 일주일 삶, 한 달의 삶을 해석하고 재정립해야 한다. 그래야만 삶의 의미가 충만히 다가온다.

많은 이들이 행복한 여행을 꿈꾼다. 하와이나 괌, 제주도를 찾아서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초월도(超越島), 초월의 섬으로의 여행이 가장 완벽한 행복 여행이다.

지금 냉담하고 있는 신앙인들은 어떤 섬에 있을까. 초월도? 아니다. 휴일에 서해안이나 남해안, 동해안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맛본다. 하지만 초월도에 그 어떤 섬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보다 더 맛있는 산해진미가 기다리고 있다. 공기도 가장 신선하다. 그렇다면 초월도는 어디에 있을까.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고 저 멀리 가야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미사에 정성스럽게 참례하면 그곳이 초월도다. 하느님을 충만하게 만나는 성체조배실이 초월도다. 열심히 땀 흘리며 참된 노동의 의미를 묵상하는 일터가 초월도다. 학업의 성취에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는 학교 교실이 초월도다.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가정이 초월도다. 세상 사람들은 크루즈 여행을 하며 세계를 돌아다니지만, 신앙인들은 초월도 여행을 해야 한다. 초월도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공명적 삶, 즉 하느님 뜻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삶은 초월적 삶으로 정향돼 있다. 여기서 초월이라는 말은 단숨에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한 단계씩 앞으로 초월해 나간다는 의미다. 공부는 학창시절에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평생 조금씩 점진적으로 높은 탑을 쌓아나가야 한다. 한 청년이 신학교 과정을 수료했다고 해서 완벽한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종신서원 했다고 해서 완벽한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종신서원을 하는 것은 요리의 재료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삶을 통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의 중요한 과제다. 시간이 없다. 당장 오늘 짐을 꾸려 참된 내면 정립을 통해 초월도로의 여행을 떠나자.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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