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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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39) 하느님 뜻과의 조화 (3)

영성생활의 꽃 ‘경외’/ 하느님 뜻과 조화 이뤄야 진정한 경외/ 명령·강요하기보단 스스로 깨우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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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 번 강조한 말이지만 인생은 ‘주고받기’다. 세상 모든 이치가‘give & take’다. 주기(give)만 하지도 않고 받기(take)만 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 이치가 인간은 주고받으며 살게 돼 있다.

한 가정에 어머니를 생각해보자. 어머니는 아기에게 사랑을 주고, 아기의 웃음에서 행복을 받는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자연과 자연은 서로 그렇게 주고받으며 공존한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해진다.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대로’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내가 줄 수 있도록 올곧게 서야 한다. 각자 하느님으로부터 창조 이전부터 섭리된 고유한 광채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빗자루는 빗자루의 고유함을, 연탄집게는 연탄집게의 고유함을, 정치인은 정치인의, 의료인은 의료인의, 언론인은 언론인의 고유한 광채를 드러내야 한다.

이렇게 나 자신도 잘 유지하고, 이웃과의 관계, 상황, 세계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이다.

이러한 공명을 발견해 내고, 공명을 촉진시키는 것이 바로 ‘경외’다. 경외는 영성생활의 꽃 중의 꽃이다. 이 경외는 ‘아!’(understand)가 아니라, ‘오!’(owe)다.

나의 외면을 한 번 들여다보자. 지금 손을 잡아 보라. 손바닥을 뒤집어 보라. 손 마디 하나 하나, 손톱 하나 하나가 얼마나 경외스러운가. 내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내 눈 앞에서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경외스러운가. 돈을 버는 행위, 그 돈으로 삶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 자체도 참으로 경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외면적인 영역이 이렇게 경외스럽다면, 정신적인 영역은 또 얼마나 경외스러운가.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장해 오면서 배우고 익혔던 수많은 지식들, 그리고 정신적 작용들 하나 하나에도 경외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경외가 진정한 경외가 되려면 공명과 연결돼야 한다. 우리의 육신과 정신과 마음이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의미다. 태어날 때 이미 받은 각자의 고유한 광채를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다. 눈도 광채를 내야 하고, 손도 마음도 정신도 광채를 드러내야 한다. 눈이 하느님의 광채를 드러내야지, 세상의 온갖 나쁜 광채를 드러내서야 되겠는가.

앞에서 세상살이는 ‘주고받기’라고 했다. 내가 경외를 살 수 있을 때, 이웃에게 경외를 줄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경외를 주지 않고, 지시와 명령, 고집을 주고 강요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라’라고 지시를 한다. 경외를 주지 않는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게 하려면 ‘공부하라’는 지시보다 공부 안에서 경외를 깨닫게 해야 한다. 경외스러움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법론을, 삶의 원리를 깨닫게 해줘야지 그냥 무작정 ‘공부해라!’라고 강요해서는 곤란하다. 부모가 경외를 주지 않는데, 어떻게 자녀가 경외를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녀나 이웃에게 어떤 것을 준다고 할 때는 물질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삶 안에 경외는 없고 형이하학적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경외는 마음의 선물이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점은 내가 상대에게 경외를 느끼고 경외를 주기 시작하면 경외는 계속해서 강화(촉진)된다는 점이다. 경외는 마치도 아무리 많이 퍼 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물을 닮았다.

경외스럽지 않은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널리 퍼지지 않는다. 그냥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경외스러운 이야기들은 그대로 모든 것이 내 안으로 쏙 들어와 나의 진정한 경외심을 촉진하고 강화시킨다. 경외심이 없는 곳에는 광채가 없다. 그냥 형이하학적인 사변들만이 넘쳐날 뿐이다.

이러한 공명과 경외의 상관관계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 ‘순명’이다. ‘하느님의 뜻과 조화로운 삶을 산다는 것’(공명)을 다른 말로 하면 ‘형성하는 신비의 뜻에 대한 순명’이다.

이제 순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묵상해 볼 차례다. 이 묵상 역시 ‘하느님의 뜻과의 조화’라는 ‘공명’의 틀 안에서 이뤄진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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