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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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4> 성체훼손과 모독, 폭력(억압)의 일상과 종교

짓밟힌 성체, 속수무책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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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서 새로운 억압의 기제가 우리 일상을 옥죄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 홍수에 시민은 속절없이 휩쓸린다. 주권재민의 형식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억압의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우리 일상이 너무나 분주하다.

 법률체계 역시 범인(凡人)이 접근할 수 없도록 복잡하고 어지럽다. 전문가에게 내맡길 수밖에 없다. 법률은 모든 시민과 사회를 위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법률가들 몫이 됐고, 대다수 시민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들도 참 많다.


 #벽에 갇힌 인간 공동선 증진 노력
 대중매체는 더 이상 정보를 소통하여 시민의 판단과 참여를 돕는 유용한 수단이 아니다. 시민은 그들 뜻대로 생산된 정보를 그저 소비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보매체는 시민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막강한 권력이다. 시민의식을 지배하겠다고 정보를 노골적으로 왜곡, 조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의 횡포는 아예 성역화되기까지 했다.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하겠다는 이들은 아예 "여러분에게 많은 돈을 안겨주겠습니다"며 드러내놓고 목소리를 높이고, 법률체계는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서 깃발을 든다. 대중매체 역시 수익 정도에 따라 영향력을 가늠하지 않는가.

 이렇게 정치 이데올로기, 법률체계, 대중매체, 그리고 자본이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증진을 위한 노력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 되었다. 시민의 삶을 철저하게 황폐화하는 이 억압기제는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명령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삶을 포기하라", "생존을 위해서는 생활을 포기하라"고 한다.

 드디어 가톨릭교회의 심장인 `성체`가 짓밟혔다. 불교 법당이 군홧발에 짓밟힌 적도 있었다. 억압기제의 비위를 맞추면 폭력의 손길에서 벗어날 줄 알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억압기제는 종교라고 관용을 베풀어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성체를 훼손하고 모독해도 그들은 교회가 침묵할 것을 감각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법당이 짓밟혀도, 성체가 모독 훼손되어도….

 그들 눈에는 종교도 그들이 지배하는 수많은 하위 권력집단 가운데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하위 권력을 적절하게 보장해준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마치 일제가 이 땅의 수많은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했을 때, 많은 우리 지도자들이 침묵했거나 친일 부역했던 것과 같다.

 #종교마저 폭력 억압기제에 순응하는가

 성체가 짓밟히고 시간이 한참 흘렀다. 그들의 오만한 판단은 옳았다. 교회는 어떤 저항의 몸짓조차 취하지 않았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강한 유감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그쳤을 뿐이다. 그들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거리에서 미사를 봉헌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나 `공무집행 방해` 같은 죄목으로 법정에 세워 실형을 선고했어도 우리 교회는 조용했다. 오히려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고 야단치기까지 했다.

 사람도 그렇게 하찮게 내팽개친 이들이 성체라고 달리 대할 리가 없다. 그들 판단에는 사람을 처벌해도 가만히 있는 교회였는데, 성체를 짓밟는다고 교회가 달리 행동할 것이라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교회가 세속의 지배와 억압기제와 상호 승인한 셈이다.

 억압과 지배를 탐내는 이들은 자본과 권력 독점에서 행복을 누리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고작 마음의 평화, 곧 종교에서 행복을 구하는 법인가. 만일 그렇다면 정치 이데올로기, 대중매체, 법률체계가 자본에 예속되어 오늘날 새로운 억압기제로 작동한다는 분석에서 또 하나, 종교를 덧붙여야 하겠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이 신음하는데, 그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도록 격려하고, 부추기고, 고무시켜야 할 종교마저 그 억압기제에 순응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사랑과 정의를 하느님 뜻으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가 융성하고, 살생을 금하고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가 문화인 세상에서, 투쟁과 불의와 폭력이 태연하게 생존과 지배 원리로 작동하는 우리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필연일지 모른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도 침묵을 강요당했는데, 성체가 모독 훼손된 것이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종교는 폭력 앞에 속수무책인 것이 아니라, 폭력의 억압기제에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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