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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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5> 강론, 건전한 논란(?)을 기대하며 <하>

구체적 생활에 적용해 복음의 진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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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항」 참조).



 
▲ 인간은 누구나 구체적 생활환경 속에 살고 있고 사제의 강론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신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삽화=임선형
 
 
#강론, 구체적 생활환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진리는 관념에 불과하다. 이는 물과 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이 없다면 그릇은 빈 그릇일 뿐이다. 또 그릇이 없으면 어디에 물을 담겠는가.
 진리! 그중에도 영원한 진리는 마땅히 현실세계에서 사람과 공동체와 만물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겪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진리는 불완전한 것이다. 불완전한 것을 영원한 진리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보편성과 타당성을 갖춰야 한다. 구체적 생활환경에서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공간적 보편성이 결여된 것이다.
 예를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가톨릭교회교리서」는 평화를 `정의의 작품이며 사랑의 열매`(「사목헌장」 78항 참조)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와 사랑, 정의는 일반적이지만 추상적인 용어다.
 철학과 법에서는 정의를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때 있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있어야 할 것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무형의 것으로는 자유와 권리 같은 것이 속하며 유형의 것으로는 재산과 소득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사제가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하는 내용의 강론을 했다고 하자. 그것은 지나치게 일반적이며 추상적이다.
 그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론을 살펴보자.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의 권리, 이런 것들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실현된 상태가 곧 정의로운 것이며 자유와 권리가 없으면 그 사회는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입니까? 불의한 사회입니까? 만일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면 평화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공공의 안녕을 명분으로 혹은 평화를 명분으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요? 그것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진리를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용해 설명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이며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인가?
 
 #군비경쟁과 세계화는 구체적 생활환경에 속하는가?
 우리 일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제주도 강정에 국민의 군대 해군은 새로운 기지 건설을 위한 기초 공사에 들어갔다. 육군은 대형공격헬기(AH-X)를 해군은 해상 작전헬기를, 공군은 8조 3000억 원을 들여 5세대 전투기 60대를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여러 관점에서 이런 사업을 바라볼 것이며 전문가들 견해도 다양할 것이다.
 우리 교회도 평화에 관한 가르침에서 군비경쟁을 다룬다. 평화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라면 군비경쟁은 구체적이며 직간접으로 보통 사람들의 생활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할 수 있다.
 군비경쟁에 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힌다. "군비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듭 선언하여야 한다. 군비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우리의 분쟁들을 더욱 인간다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거부한다면 이 악의 길에서 우리는 어디로 끌려갈지 모른다"(81항 참조).
 사제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나타나 평화를 비는 대목을 말하며 「사목헌장」의 가르침을 인용했다고 하자. 사제의 강론은 평화에 대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해설인가? 우리 공동체의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용한 설명인가?
 교우들은 강론이 구체적 생활환경에 맞춰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 구체적 생활환경에 대한 이해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신과 가족 혹은 가까운 생활영역만을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지구 저편의 처지도 자신의 생활환경의 범주에 포함한다.
 앞의 생각도 부정할 수 없지만 나중의 생각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자신과 가까운 생활영역에서 체험하는 것들의 배경을 따져 들어가면 그 영역은 확장될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 불화가 있었다고 치자. 이는 개인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시야를 넓히면 경제적 곤란과 실직, 경제구조의 변화, 세계경제 흐름 따위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정의 불화를 극복하려면 당사자의 성격과 태도 변화뿐만 아니라 그 가정이 놓인 사회와 국가, 세계 환경의 변화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제의 강론은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용해 하느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강론에 대한 건전한(?) 논란은 그만큼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성찰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제에게도 교우에게도 강론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깊은 성찰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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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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