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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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없는 영광 보여준 드라마 ‘더 글로리’의 사적 복수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4. 미디어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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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와 드라마,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있나요? 재미와 의미를 모두 읽어내는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칫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환호성 치는 광기 들린 구경꾼과 같은 매체 소비자가 될 수 있다. 출처=pixabay

 


“엄마, 드라마 ‘더 글로리’ 정말 재미있지 않았어요?”

“아니, 보고 나서 찝찝하고 기분이 안 좋았어.”

“그렇게 당한 사람들 많아요. 복수해야 해요.”

“그런 복수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개연성 없던데.”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저렇게까지 복수할까 싶어. 난, 이해가 되던데.”

딸은 정말 통쾌했고 재미있었단다. 엄마는 복수과정이 황당하고 불편했단다. 젊은 세대인 딸은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 판타지이고 허구로 보란다. 어머니는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를 판타지로 본다는 그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단다.

최근 압도적인 화제성을 기록한 드라마, ‘더 글로리’는 고등학교 시절 끔찍한 학교 폭력을 당한 여주인공이 자신의 온 생을 걸고 처절한 복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해자들이 스스로 자멸하는 통쾌한 복수극은 계획대로 실행에 옮겨진다. 동물처럼 서로 물어뜯고 찢기는 가해자들의 참담한 최후의 현장에서 주인공은 무표정하게 관조한다. 주인공은 스크린 안에서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스크린 밖에서 그와 한몸이 되어 관음증적 즐거움을 누린다.

드라마는 고발한다. 죄 없는 이들이 이유 없이 피해를 당하고 평생을 상처와 트라우마로 억울하게 살아왔다고. 법도 신도 피해자를 도와주지 않는데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기에 드라마에서라도 가해자들을 통렬하게 확실하게 징벌해야 한다. 주인공은 영리하게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음으로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낸다. 선과 악, 빈과 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서는 절대로 용서와 화해라는 것은 언급도 말아야 한다. 가해자를 절대 악마화하면서 복수과정에서의 끔찍한 폭력과 파괴는 정당하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재미’있다고.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라고.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영화는 ‘충격 체험의 훈련장’이라고 한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영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우린 저절로 잔인한 폭력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익숙해질수록 둔감해지고 당연시하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특히 청소년기의 뇌는 폭력적인 영상에 노출되면 될수록 폭력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고, 공격적 행위를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영상세대인 젊은이들이 미디어 폭력에 더 관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영광이 없는 영광을 보여준 드라마 ‘더 글로리’의 사적 복수에 대한 불편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용서와 화해로 영광을 얻는 길을 택했어야 한다는 고루한 훈수를 두려는 것도 아니다. 고통받는 약자의 입장에 서서 반성 없는 가해자를 통쾌하게 처단하는 것에 반대할 생각도 없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라는 텍스트에 대한 ‘무엇’이 아닌 ‘어떻게’ 읽고 있는지에 대하여 묻고 싶을 뿐이다. ‘매체 환경은 그 자체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방식 그리고 지각방식에도 변화를 주기에(마샬 맥루한 Marshall McLuhan)’ 그저 ‘재미감정’에만 가둬둘 수는 없다. 재미나 쾌락이란 원초적인 감정에 갇혀 내 마음속 의미체계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금방 허기지게 하는 가짜 포만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허기짐은 자극적인 것에 중독되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과 내면 그리고 영혼을 잠식시키고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깊이’의 사고를 어렵게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보는 것보다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고 느끼는가에 있다. 감정은 나의 모든 경험의 최종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폭력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영리하고 상업적인 이야기꾼들은 아무리 끔찍한 폭력이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아요’란 동의를 얻어내게 만든다. 자극적일수록 흥분하고 감정이입이 지나쳐 관객의 자리를 이탈하고 스크린 속에 빠져버린다. 마치 로마 원형극장의 잔인한 피의 향연에서 상대가 죽을 때까지 칼을 휘두르는 검투사와 한몸이 되어 미친 듯이 ‘죽여라!’라고 외치는 광기 들린 구경꾼처럼 말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놀러 와서 까무러치게 놀랄만한 장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자기 돈을 내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피 흘리며 물고 뜯기는 잔인하고 끔찍한 복수 이야기에 빠져 열광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프랑스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은 읽을 수 있지만 읽지 않는 문맹인”이라 해요. 글은 읽는데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문맹이라는 것이죠. 이야기꾼이 의도한 대로 재미있게 보지만 더 이상 진지한 비평과 해석이 없다면 우리도 역시 문맹인인 거죠. 재미와 의미를 모두 즐길 수 있는 문해력(literacy)을 키우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들의 자녀들에게요. 글만 읽는 것이 아닌 영상도 읽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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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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