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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성인] 성 둔스타노(5월 19일)

909?~988년, 영국 출생 및 선종, 대주교, 세공인의 수호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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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스타노 성인은 영국 잉글랜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아일랜드계 수도자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예술, 수공예 등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청년이 되어 애설스탠 왕의 부름을 받고 궁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인정을 받았는데, 동시에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됐습니다. 결국 둔스타노는 궁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둔스타노는 윈체스터로 가서 그곳의 주교이자 삼촌인 알페기우스 성인과 함께 지냈습니다. 알페기우스는 조카가 수도자가 되길 바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둔스타노는 독신생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온몸의 피부가 부어오르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가 치유되고 나서 수도자가 되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934년쯤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됐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전 대장간에서 일하던 때 발에 편자를 박아달라는 악마를 알아보고 물리친 이야기는 전설과 같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제품은 939년 알페기우스에게 받았습니다.

은수자로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둔스타노는 작은 은둔소를 짓고 학문과 예술 연구에 힘썼습니다. 애설스탠 왕이 숨지고 그의 동생 에드먼드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둔스타노를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왕의 호의를 시기한 신하들의 음모에 휘말려 궁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국왕은 943년에 둔스타노를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수도원 재건과 개혁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원장이 된 둔스타노는 즉시 베네딕도회의 정신에 기초해 수도원 개혁 작업에 착수했고, 그곳을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다른 수도원들을 활성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946년 에드먼드 1세 왕이 살해되자 둔스타노는 자문관이 되어 에드먼드 1세의 동생인 에드레드가 왕좌로 나아가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 모든 수도원을 대상으로 원대한 개혁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955년 에드레드 왕이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이자 에드먼드 1세 왕의 장남인 에드위그가 국왕직을 계승하면서부터 시련을 맞았습니다. 새 국왕은 둔스타노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그를 왕국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잉글랜드를 떠난 둔스타노는 플랑드르 지방의 겐트로 피신해 그곳의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957년에 국왕의 동생인 에드가에 의해 에드위그 왕이 축출되면서 둔스타노는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어 우스터의 주교로 임명됐습니다. 이듬해 그는 런던의 주교가 되었고, 960년에 로마로 가 요한 12세 교황에게 팔리움을 받고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승품됐습니다.

둔스타노는 새 국왕인 에드가의 자문관으로서 국가와 교회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에텔볼두스 성인, 오스왈두스 성인과 함께 교회 규율을 쇄신했고, 이전에 데인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많은 수도원을 재건하는 데 힘썼습니다.

정계에서 은퇴한 둔스타노는 캔터베리로 돌아와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선종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됐습니다. 둔스타노는 선종 이후 오래지 않아 영국인들에게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1029년에 공식적으로 시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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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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