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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성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9월 13일)

344/354?-407년, 안티오키아 출생 및 코마나 선종, 총대주교,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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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버지 세쿤두스와 어머니 안투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20세가 되던 해 사망했습니다. 이에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요한은 세속적인 출세를 위해 이교도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회의를 느끼고 친구이자 후에 타르수스의 주교가 된 디오도루스와 함께 성경 연구와 수덕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수도생활을 갈망했던 요한은 안티오키아 인근 광야에 가 나이 든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수덕의 삶을 꿈꾸며 동굴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2년간의 고행과 성경 독서를 했습니다.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이 크게 망가지자, 그의 어머니는 눈물로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했습니다.

요한은 381년 멜리티우스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5년 뒤쯤 플라비아누스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후 12년 동안 설교 사제로 활약하며 수많은 명강론을 남겼습니다. 그의 강론은 너무나 유명해져 요한은 ‘크리소스토모’, 다시 말해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넥타리우스가 숨을 거두자 황제는 요한을 후임자로 임명하려 했습니다. 요한은 이를 거절했지만,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398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로부터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수도의 총대주교가 된 요한은 궁중 생활과 밀착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했습니다. 신자들에게도 윤리적으로 쇄신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구호 사업을 시작하고 교회 개혁을 시도했으며, 에페수소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해 성직 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개혁에 반발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요한의 가장 극렬한 적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테오필루스였습니다. 황실과도 처음엔 관계가 좋았지만, 요한이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지적하자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요한은 403년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콘스탄티노플 근교인 퀘르치아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면직되었습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도 요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해 주교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고는 그를 비티니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만은 요한의 진심을 알아주었습니다.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요한을 보호하고자 했고, 이에 놀란 에우독시아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했습니다.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돌아왔습니다.

이후 404년 황제는 다시 요한을 오늘날의 알바니아로 유배를 보냈는데, 그를 만나려는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계속되자 피티우스라는 험한 숲 속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했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코마나에서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요한의 강론에는 바오로 사도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됐습니다. 인노첸시오 1세 교황은 412년 요한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요한의 유해는 1626년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됐습니다. 1568년 비오 5세 교황은 요한을 교회학자로 선포하며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드높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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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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