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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현장에서] ''오늘''이라는 빙고 카드

정윤섭 신부 (인천교구 이주ㆍ해양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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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명절을 하루 앞둔 2월 9일. 인천 답동성당은 조용했다. 날씨도 다소 쌀쌀하고 눈도 내렸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그 고요함을 깨고 필리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보통 주일 오후 4시에 봉헌하는 영어 미사를 전후로 외국인들이 오고 가지만, 명절이라 모두가 가족을 찾는 그 시간에 이들도 가족을 대신하는 이웃사촌끼리 답동성당에 모인 것이다. 이유는 빙고 게임을 하기 위해서다. 명절을 맞아 대부분 일터가 문을 닫는 이때 그들은 한데 모여 웃음과 음식을 나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들이 "Father Joseph!"이라며 나를 불러 엉겁결에 앞으로 나갔다. 게임에 앞서 시작기도를 부탁하기 위해서란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쌩스 갓(Thanks God)`을 몇 번 하고는 얼른 십자성호를 긋고 맺었다. 시작기도를 마치고 마이크를 넘기자 사회자는 아주 능숙한 언변으로 행사를 진행한다. 그는 마치 경마장이나 미국 TV쇼 프로그램 사회자 같았다. 그의 현란한 몸짓과 말솜씨는 모두를 소리치고 손뼉 치게 한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의 말이 지방 사투리처럼 구수하게 느껴져 내 어깨도 절로 들썩인다.

 담벼락을 하나로 답동성당과 맞닿아 있는 수녀원에서는 이 괴성이 어떻게 들렸을까. 고요한 휴일을 보내고 있었을 수녀님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이들에게는 웃음과 탄성을 자아내고 스트레스를 날리는 기쁨의 팡파르인 것을.

 "빙고, 빙고!"

 예전에 나도 외국에서 잠시 지낼 때 그곳 어르신들이 하는 차분하고 잔잔한 빙고 게임을 본 적 있다. 그러나 필리핀 친구들은 좀 달랐다. 목청껏 소리 지르고 음식을 나누며 노래도 불렀다. 행사장은 그야말로 예능 버라이어티 쇼를 연상케 한다.

 빙고 게임은 번호가 붙어있는 공을 통속에 넣어 굴린 후 하나하나 꺼내며 맞춰가는 방식이다. 많은 이들은 빙고가 되길 기원했다. 그날 나는 누가 빙고를 외쳤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누군가는 빙고를 외치고 누군가는 실컷 떠들기만 하고 돌아갔다. 대각선과 직선, 무엇이든 맞아주길 기다리며 한 칸 한 칸 온 힘을 다해 채워가는 그들 모습이 마냥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이 인생이라는 카드는 빙고 게임처럼 복잡하고 변화무쌍해서 그렇게 잘 맞아주질 않는다. 아니 어쩌면 하도 복잡해 이미 맞았는데도 우리는 빙고를 외치지 못하고 불안과 우울로 또다른 번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이들의 빙고에 현혹돼 또다시 무리한 카드를 꺼내드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오늘`이라는 카드를 손에 들고 있다. 수평, 수직, 대각. 어느 쪽을 먼저 채워볼까? 하느님! 오늘은 어느 쪽에서 빙고가 터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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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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