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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현장에서] 아빠와 아들

정윤섭 신부 (인천교구 이주ㆍ해양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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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인천항. 낡고 육중한 배가 부지런히 철제를 옮겨 싣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흑해 연안을 출발해 걸프만과 인도양을 거쳐 중국에 머물다 들어온 배였다.

 갑판에 검은(흑인) 선원 한 사람이 보여 곧장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눈앞에는 하얀(백인) 선원이 나타나 말을 건넸다. `내가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그 사이 교대를 했나? 분명 검은 선원이 있었는데….` 의아한 생각을 뒤로하고 그에게 `스텔라마리스`에서 온 가톨릭 사제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검은 선원이 다시 나타났다. 얼떨떨한 얼굴을 한 나는 마치 흑과 백 가운데 회색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그들은 배에 인도인 14명, 우크라이나인 8명 선원이 있다며 검은 선원들은 가톨릭 신자, 하얀 선원들은 동방정교회 신자라고 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번갈아 인사하고 재빨리 기념품부터 건넸다.

 백인 일등 항해사는 "지금은 모두가 일하느라 바쁜 시간"이라며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흰 수염이 멋지다고 칭찬을 늘어놓으며 잠시 머무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선실에 들어가니 그의 말과는 달리 흑인 선원 3명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23년이나 된 배는 비교적 깨끗했다. 우크라이나인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가 함께 있어선지, 인도인 특유의 진한 카레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방장도 인도인이었지만 카레는 일부러 피하는가보다. 백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사제가 올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너도나도 모였다. 동방정교회 선원들은 바쁜지 보이지 않았다. 이후 가톨릭 선원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열심한 신자 공동체란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배 여기저기에는 예수상과 성모상, 기도문이 붙어 있었다. 인도 선원들은 손과 목에 묵주를 걸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형제도 있었다. 두 달 전 예쁜 아들이 생긴 형은 아직 아이를 보지 못했단다. 여섯 달이나 더 항해해야 하는 그의 모습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보였다.

 한 가족이 같은 배에서 일하는 경우는 드문데 이 배는 좀 달랐다. 형제 선원 외에도 선장과 이등 항해사가 부자지간이었다. 게다가 선장은 모든 선원을 아들처럼 아끼고, 선원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내다고 한다. 선원들은 또 선장을 아버지처럼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이 배는 `패밀리 배`였다. 설명을 듣고 나니 배에 오를 때 가졌던 약간의 오해는 사라졌다. 진한 카레향을 묶어둔 것도 우크라이나 형제들에 대한 인도 선원들의 배려였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나의 얼굴빛은 본연의 황색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흘 후 그들은 다시 걸프만으로 돌아간다. 얼굴색, 종교는 다르지만, 아빠와 아들, 그리고 형제애로 일치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에 늘 순풍이 불어주길 기도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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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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