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한상수자수박물관에는 19세기 초에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선교사의 혈흔이 묻은 제의와 영대가 보관돼 있다. 자수를 통해 한국의 전통을 지키고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기능보유자 고(故) 한상수(마리아·1935~2016) 선생이 수집한 것이다.
한 선생은 1970년대부터 전국을 돌며 자수 유물들을 모아 분석하면서 기법들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이 제의를 발견했다. 한 선생의 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이수자 김영란(수산나) 한상수자수박물관 관장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영향으로 가족 모두가 신자”라며 “어느 작품 못지않게 이 제의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도 불교처럼 중앙박물관을 만들어 중요한 유물들을 한 곳에 모아 보존하고 신자들에게도 전시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이 제의는 2018년 대만 세계종교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제주에서 태어난 한 선생은 17세에 상경해 자수를 배웠다. 1963년에는 자수공방인 ‘수림원’을 세워 한국 자수의 역사와 문양, 기법, 용어 등을 정리하며 전통 자수의 이해와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1981년에는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중 한 선생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는 것이 천수국수장 복원이다. 천수국수장은 622년 일본 태자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에서 제작된 자수 작품으로, 고구려인 가서일과 백제인 양부 진구마가 감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 선생과 김 관장 모녀는 1400년의 시간을 초월해 삼국시대의 제직 기술을 원형복원했다. 천수국수장은 총 2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2007년 완성되면서 우리의 화려했던 고대문화를 재현했다.
한 선생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한국 전통 자수는 불교문화와 밀접하다. 덕분에 한 선생은 자수를 통해 종교를 넘나드는 깊이를 보였고, 여성의 주체성도 끌어올렸다. 그는 생전에 “자수가 여성의 덕을 키우고 인내하는 정도의 취미생활로 남지 않았으면 한다”며 “자수는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김 관장은 “자수에 대한 연구와 작품 활동, 전시 등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창작 열정에 불타 있었다”고 회상했다. 자수 전문가들도 “한 선생이 자수와 관련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 자수에서 한 선생은 그야말로 전설이다.
2005년 서울 가회동 북촌한옥마을에 사립박물관으로 등록된 한상수자수박물관은 한 선생 선종 후 성북동으로 이전해 그의 작품과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본관에서는 상설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체험 및 교육, 교류전시, 복원수주, 학술연구 등을 위해 ‘한상수자수문화유산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현재 한상수자수박물관에서는 ‘길상동물을 만나다’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자수공예와 격사공예, 직물공예로 표현된 다양한 양식의 길상동물을 감상할 수 있으며 한 선생의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아울러 한상수자수박물관 인근에 위치한 서울 성북동 성북선잠박물관에는 ‘영원불멸 금을 입다 ? 금박(金箔), 금수(金繡), 직금(織金)’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곳에서 한 선생과 김 관장이 작업한 금박, 금수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길상동물을 만나다’ 특별전은 9월 13일까지, ‘금박, 금수, 직금’ 특별전은 10월 3일까지 열린다.
※문의 02-744-1545 한상수자수박물관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