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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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희 신부의 영화속 복음 여행] (17)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이들- 마이클 화이트 감독의 "사랑의 침묵"

맨발의 가르멜 수녀들과 떠나는 침묵으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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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에서 기도하는 수녀.
 
 
  1. 움직이는 연속 이미지로서의 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한동안 붙들어놓고 마치 `여행하도록` 인도하며 영화 속 이야기를 체험하도록 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관에서 관객은 지금까지 유지해온 자신의 일상세계를 벗어나 영화 속 다른 세계와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영화관 밖을 나서는 순간, 영화관을 들어설 때와는 다른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그건 영화관에서 무엇인가 내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영화관이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기도와 묵상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 가능성을 아주 강하게 주었던 영화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 알프스의 깊숙한 계곡에 자리 잡은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최초로 카메라에 담은 필립 그로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 2005)`이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영화가 `사랑의 침묵(No Greater Love, 2009)`이다.

 이들 영화들은 수도원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며 전개해나가는 여느 극영화와는 달리 특별한 이야기도 없고, 주인공도 없다. 이야기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수도자들 모습과 수도원 자체의 일상이다. 수도원과 수도생활 자체를 탐구하며 그 의미를 묻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얼마나 그곳에 몰입하느냐다. 그것에 따른 변화의 체험은 관객의 몫으로 돌아온다.


 
▲ 제병을 만드는 수녀.
 
 
 2. 영화 `사랑의 침묵`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규칙적으로 울리는 수도원의 종소리, 그것으로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가끔은 하늘에 헬리콥터가 지나가는 것을 통해 고요와 침묵이 머무는 그곳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일깨우는 봉쇄 수도원, 맨발의 가르멜 수도원에 관한 영상 기록이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방문자이길 원한다. 인간의 침묵이 머무는 그곳에 유난히 울림이 큰 것은 주변의 소리들이다. 바람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밭을 가는 농기계 소리, 그리고 수도자들이 바치는 기도 소리….

 이렇게 관객이 침묵이 주는 새로운 체험에 놀라워할 때 그곳에 사는 수도자는 다가와 잔잔하게 말한다. "침묵은 하느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라고. 바로 그것이 그들이 침묵을 통해 진정 듣고자 하는 목소리의 실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어쩌면 그들은 복잡한 세속의 삶을 떠나 걱정 없이 살려고 현실을 도피한 사람들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감옥보다도 더한 그 곳에서 혹독한 삶을 살아내는 그들 생활이 비인간적이라고.

 그러한 편견과 오해에 대해 수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수도원의 삶은 자기만족을 위해서나 예식이나 기도가 멋스러워서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오직 "하느님께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전부 바치려는 사랑과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적 갈등과 혼란이라는 `영혼의 어두움`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끊고 버리는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그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르멜 수도자들 일상은 기도와 일의 반복으로 채워진다. 외부 성당에서 쓰일 제병을 만들고, 세탁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밭을 맨다. 그리고 일하는 사이에도 그들은 함께 기도한다. 이러한 기도 행위는 매순간 봉헌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일하느라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그들이 하느님 앞에 머문다. 그리고 수도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어려움을 떠올리며 기도를 바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들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찾는다.

 수도자들 봉헌의 삶은 성주간 전례를 통해 그 의미가 궁극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그들 삶의 이유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에 함께 하는 것이다. 단순히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곳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숭고한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온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아낌없이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는 새로운 삶, 부활의 삶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여타 웰빙(well-being)을 위한 내적 명상과는 다른 그리스도교의 영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한편 디지털 시대에 각박하고도 빠른 변화에 길들여진 관객에게 일과 기도, 침묵 속에서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반복된 일상이 지극히 단조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들 삶에 익숙해져가는 동안 순간순간 다르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흙더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새싹이 경이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함께 깊어가는 수도자들의 영적 깊이가 느껴질 것이다.

 가끔 그들 일상 속에서도 큰 사건이 있다. 한 생애를 봉헌의 삶으로 살았던 노수도자가 죽음을 맞고 그들이 사는 정원에 소박하게 묻혀 그들과 삶을 계속한다. 이어 새로 입회한 수도자 서약식이 이어짐으로써 수도자들 봉헌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렇게 수도자들은 삶과 죽음을 일상에서 경험하며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간다. 결국 관객은 하나의 방문자로서 수도원에 머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한다.

 아울러 쉬는 시간에 주변이 잠잠할 정도로 수다를 떨기도 하고, 모두가 함께 모여 포크댄스를 추며 즐거워하는 수도자들 모습을 통해 그들이 특별한 체질의 사람들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체질의 사람들이



가톨릭평화신문  201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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