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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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희 신부의 영화 속 복음여행] (21.끝) 하느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슬픈 사람-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감독판"

사랑 없는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 은총을 이기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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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에는 `거리두기`(반환영주의)라는 이론이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인물이나 사건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영화다`라는 것을 배우들의 연기나 카메라 워킹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다.

 흔히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영화 속 인물이나 이야기와 동일 선상에 두게 된다. 그런 가운데 나름 재미와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볼 때 영화를 더 폭넓게 이해하기도 한다. 특히 영화를 복음적 시각에서 보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한데, 영화 속 인물이나 이야기와 성경 속 인물이나 이야기의 유사성을 찾을 때가 그러하다. 그러고 나서 영화 속 인물이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면 영화가 주는 풍요로움이 더해질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감독판`(Amadeus Director`s Cut, 2002)에 주목해 보자.
 

 
▲ 모차르트의 `레퀴엠` 작곡을 도와주는 살리에리.
 
 
 2.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살을 시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한 `살리에리`라는 늙은 음악가가 가톨릭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면서 지난날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형식으로 진행된다. 살리에리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지극히 순수하고도 감동적인 소망을 가지고 자란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바람대로 당시 음악가로서 성공을 말해주는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악장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능가할 작곡가도 그 만큼 성공한 작곡도 없을 즈음에 갑자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Amadeus) 란 뜻의 이름을 가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나타난다. 그때부터 살리에리는 자신만이 알고 겪어야 하는 극적인 삶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하느님 은총과 인간의 노력에 관한 것으로, 인간 행위인 노력은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 앞에선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비범함은 살리에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그리고 이후 여러 번 실제로 체험하면서 그의 감정은 모차르트에 대한 단순한 질투심을 넘어 결국 하느님을 향한 분노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영화는 살리에리의 시선으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을 아주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평범(=인간의 영역)과 비범(=하느님의 영역)의 차이가 그 깊이와 거리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시킨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대면할 당시 이미 궁정음악가로서 최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모차르트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젊은 작곡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처음 만나는 순간 그의 비범함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마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몰래 훔쳐보면서 거의 경악에 가까운 환희의 표정으로 떨고 있는 것을 차라리 고통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경탄 장면은 여러 번 더 나오는데 그때마다 살리에리의 표정은 두 가지로 엇갈린다. 하나는 `이게 한 번도 고치지 않은 원본이라고요?`하고 묻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경탄의 표정이고, 다른 하나는 시선을 위로 향하며 `하느님, 그토록 원했는데 저는 열정만 주셨지 왜 재능은 주지 않았습니까?`하고 절망 섞인 분노를 표출하는 표정이다.

 결국 살리에리는 그 분노의 표정으로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불에 던지며 하느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불타는 십자가를 노려보며 하느님이 자신보다 사랑하는 모차르트를 반드시 파괴할 것을 맹세한다.

 마침내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두 사람의 운명은 다르게 나아간다. 모차르트는 `이보다 더 완벽한 작곡은 없다`고 여길 만큼 열정을 쏟았던 그의 음악이 환영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마저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더구나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를 아는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한다.

 반면에 살리에리는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하여 왕에게서 금세기 최고 음악가란 칭호를 받으며 `이보다 더 큰 인기는 없다`는 영예를 얻는다. 그러한 영예를 얻으면서 그는 모차르트의 반응을 곁눈질하다가 하느님을 향해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더 절망적인 슬픔이 묻어난다.

 한편 모차르트는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서 저런 음악이 나올 수 있을까?`하고 샬리에리가 의문을 가질 만큼 하느님 은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음악들을 작곡해낸다. 그는 도덕적 이유로 `피가로의 결혼`이 상연되는 것을 반대하는 황제 앞에서 `저는 비록 저질스럽지만 제 음악은 아닙니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작곡한 음악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다른 `신성한 힘`(?)`에서 온 것으로, 자신의 작품을 자신과는 다른 작품이라는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길 원한다. 자신의 영역이나 감정을 넘어서 작품에만 몰두하고, 주변 반응이나 인기를 고려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눈치 보지 않고 그대로 악보에 옮기는 데 주력하는 우매한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평범(=인간)과 비범(=하느님)의 싸움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절묘하게 보여준다. 살리에리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모차르트가 점차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에 일조한다. 또한 마지막까지 모차르트의 옆에서 마지막 걸작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레퀴엠)`의 완성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런 그의 이중적 태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왜?``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바라던 대로 모차르트를 파멸시켜가면서도 통쾌해 하거나 기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또 모차르트의 임종을 지키며 그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기도 하고, 모차르트 장례식에서는 우울하고도 씁쓸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 답변은 그가 훗날 사제에게 고백하는 부분에서 밝혀진다. 살리에리는 하느님을 이기려고 했지만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살리에리는 하느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모차르트를 반드시 파멸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걸작을 쏟아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살리에리는 어느새 하느님에 대한 분노에 빠진 `평범`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보인 `비범` 앞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평범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인기와 명성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고, 나아가 모차르트라는 인간마저도 파멸시킬 수는 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시대를 넘어선 영원성과 천재성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



가톨릭평화신문  20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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