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법원이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배상을 명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 베드로 주교)을 비롯한 한국 내 베트남전쟁 관련 시민단체들은 강우일 주교를 구심점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국가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오랫동안 요구해 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월 7일 베트남인 응우옌 티탄(63)씨가 한국 정부에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대한민국이 응우옌씨에게 3000만100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배상액을 4000만 원으로 산정했지만 원고(응우옌)가 청구한 금액이 3000만100원이어서 청구액 한도에서만 배상 책임을 결정했다.
응우옌씨는 8살이던 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반구 퐁니마을 집 주변에서 한국군 해병대가 쏜 총에 옆구리를 맞아 중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5명은 목숨을 잃었다.
응우옌씨 가족과 비슷한 사정으로 베트남전쟁 중 한국군에 의한 다수의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인식돼 왔지만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다. 한국 법원이 판결을 통해 베트남전쟁 중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확인함으로써 한국-베트남 과거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만들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우일 주교는 2월 9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국가배상소송 1심 판결을 접하며’를 발표하고 “전쟁범죄에 관해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적 통념을 우리 사법부가 수용한 양식 있는 판단”이라고 밝혔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에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리라 본다”면서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일은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 가장 먼저 밟아야 할 수순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베평화재단을 포함한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도 8일 입장문을 발표하고 “베트남전쟁 과거사 문제는 한국 정부의 외면과 침묵 속에서 오랜 세월 제자리걸음에 머물렀지만 이번 판결로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됐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이번 판결은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 시민사회가 품고 있는 여타 전쟁범죄 해결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의정부교구장 이기헌(베드로) 주교도 2월 5일 베트남 랑선-까오방교구를 친선 방문하고 집전한 미사에서 “과거 베트남전쟁에서 한국 군대가 평화를 거슬러 잔인한 폭력을 저지른 일에 용서를 청한다”고 사과했다. 랑선-까오방교구장 자우 응옥 찌(요셉) 주교는 “이기헌 주교의 형제이자 한국인으로서 용서를 청한다는 강론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화답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염지유 기자 gu@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