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국에 있는 ‘데스(death)’ 카페를 알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가벼워지고 밝아진다고 한다. 그 앞에서 오히려 쓸데없는 가식이나 허세가 사라지면서 본연의 모습이 되는가 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조니’는 우뇌에 발생한 신경교종으로 세상을 떠난 폴란드 신부 얀 카치코프스키가 보여준 따뜻하고 정이 담긴 이야기이다.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그의 원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그는 임종을 준비하고 있는 노인들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을 세우고 그들의 마지막을 존엄과 사랑으로 지킨다. 물론 그 좋은 일도 위로부터 방해받지만, 생명 윤리학자라고 자신을 칭하는 신부님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나 죽음의 순간 곁에 머물며 그의 삶을 인정해주고, 죽음이라는 것을 평온히 받아들이는 법을 일깨운다.
죽음이 마치 없애야 할 질병인 양 마지막까지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현대 의학의 모습도 좋은 것이지만,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죽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손을 잡아주는 것도 남겨진 이들이 주는 참 훌륭한 마지막 위로란다.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위로를 바라지 않아요,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을 거라고 되뇌는 것도 아니지요. 겁내지 마라, 어떤 일이 있어도 너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라며 함께 하는 시간이지요. 우리만의 시간. 관계가 어려울수록 더 정성껏 관계를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죠’라고 말한다. 무언가 깊은 생각 속으로 초대받는 느낌이다.
위로나 연민이 아니라 함께하며 보내는 시간과 지지, 죽음이 너나없이 모두에게 때가 되면 오는 것임을 평온히 받아들이는 태도, 한 걸음 나아가 신앙인인 우리는 죽음이 옷을 갈아입고 주님을 만나러 가는 설레는 여정임을 인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회가 발전할수록 복잡하고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소중한 것은 단순하고 명확한 것 같다. 사연들을 듣다 보면 용서보다는 깔끔하다는 표현으로 관계를 싹둑 자르고, 가족 간에 마지막 용서를 청하는 모습 앞에서도 매몰차게 돌아서는 것이 상식인 양, 정의인 양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순간적으로 편할 수는 있지만, 한세상을 살면서 깊은 후회로 남지 않을까 싶다.
얀 신부는 떠나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삶의 많은 시간을 전과자로 살아오다가 법원의 명령으로 사회봉사 기간을 채우러 왔던 파트리크라는 젊은이에게도 최선을 다한다. 마치 동생처럼 그에게 도움이 될 모든 것을 쏟아 결국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도와준다.
떠나는 이도 살아갈 이도 모두는 사랑과 존중의 대상일 뿐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떠나는 얀 신부가 부럽다. 멋진 인생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넷플릭스 3월 23일 공개
손옥경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가톨릭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