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영화 제목부터 말해야겠다.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은 눈썹 사이의 주름을 뜻한다. 전혀 감이 안 잡히는 제목이다. 스웨덴 출신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이 독특한 제목의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영화는 세 개의 파트로 진행된다. 감독은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1부에서는 모델 커플인 칼과 야야가 데이트 비용 문제로 다툰다. 왜 항상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느냐는 것이 칼의 불만이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돈을 낼 때는 뒤로 빠지는 여자들에 대해 꼬집고 있다. 흥분해서 따지는 칼의 모습에 관객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기 때문이다.
2부에서는 호화 여객기에 탑승해 크루즈를 즐기는 부자들과 칼과 야야 커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똥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든(비료를 팔아 부자가 된 러시아 부자), 무기를 팔아서 부자가 되었든(무기상 부부), 인플루언서여서 무료로 탑승을 하게 되었든(야야와 칼), 이들은 함께 크루즈를 하게 된 운명공동체다. 이들은 돈으로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호화여객선에서 승무원들과 청소부들을 하인처럼 부리며 자본주의의 정수를 누린다. 그러나 곧,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하는 배는 해적에 의해 난파당한다.
3부는 몇몇 생존자들이 무인도에 표류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돈은 무용지물이 된다. 여객선에서 힘을 발휘했던 부자들은 힘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을 구하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이가 힘을 갖는다. 기존의 위계질서가 뒤집히는 것이다. 또한, 1부와 2부에서는 야야의 외모가 경제적으로 더 가치가 있었다면, 여기에서는 칼의 외모가 더 빛을 발한다. 감독은 부조리한 계층 구조를 보여주고, 이 모든 것들이 전복되는 상황을 연출한다.
우리는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세상에서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하다. 그만큼 외모가 중요해졌다. 너무 바쁜 현대인들은 누군가의 생각을 읽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보다 잘나 보이기 위해, 유명 브랜드를 찾고, 더 아름다워 보이려 애쓴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웃다 보면 147분이라는 꽤 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빠져나올 때쯤에는 계층과 인간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자. 이 영화에서 ‘슬픔의 삼각형’은 단순히 눈썹 사이의 주름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피라미드 계층 구조를 말한다. 그것이 지금처럼 인간의 내면이나 영혼에 상관없이 돈으로만 이야기되는 한, 그 삼각형은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5월 17일 극장 개봉
서빈 미카엘라(가톨릭영화제 프로그래머, 극작가·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