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대학생, 교사, 농민, 장애인, 어린이.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살기 위해서’다. 지구에서 살 날이 많이 남은 어린이들에게 아픈 지구는 미래를 꿈꿀 수 없게 했다. 자연을 통해 먹고 사는 농민에게 아픈 지구는 이미 생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고 있는 현실은 이제 기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수녀들은 거리로 나와 형제, 자매의 손을 잡았다.
9월 23일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이를 이겨내고자 모인 사람들이 만든 희망의 빛이 공존했다.
■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을 찾다
‘9·23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이하 9·23 조직위)는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에서 기후정의행진을 열었다. 시민사회 및 종교 단체 600여 개가 참여한 이번 행진에는 3만5000여 명이 참가했다. 각 단체별 사전행사 이후 오후 2시 세종대로에 모인 사람들은 기후정의행진에 함께한 이유를 상기했다.
지구온난화가 전 세계적 화두가 된 지 오래지만, 한국 정부의 탄소중립 관련 정책은 퇴행하고 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 신규 핵발전소 건설,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방관, 4대강 사업 역행 등 한국 사회에 산재한 환경 문제가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기에 3만5000명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9·23 조직위는 이날 집회에서 “윤석열 정부는 허구적이고 비민주적인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을 내세우며, 기후재난 앞에서 무책임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노동자와 지역 주민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 계획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삶의 기본인 먹거리는 위태롭고, 농민과 농촌의 삶은 무너져간다”고 토로했다.
중요한 것은 한 사회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합의하는 과정인 정치의 장에서 기후위기의 당사자들이 배제됐다는 것이다.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평범한 이들, 기후위기의 중심에 놓인 이들이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척당한 이들, 평범한 이들이 ‘힘’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 세종대로에 모인 사람들은 정부를 향해 ▲기후재난으로 죽지않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할 것 ▲핵발전과 화석연료로부터 공공 재생에너지로,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 실현 ▲철도 민영화를 중단하고 공공교통을 확충해 모두의 이동권을 보장할 것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신공항건설과 국립공원 개발사업 중단할 것 ▲대기업과 부유층 등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고,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집회가 끝난 뒤 용산 대통령집무실, 일본대사관, 정부서울청사를 지나는 행진이 진행됐다. 수녀와 스님, 장애인과 비장애인, 어르신과 어린이 등 접점이 없었던 이들은 기후정의행진에서 하나가 됐다. 행진을 하며 줍깅을 하는 청소년들 뒤에 선 어르신들은 “기특하다”며 함께 쓰레기를 주웠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 옆에 선 시민들은 그들의 손과 발이 돼 함께 걸었다. 묵주를 든 수녀와 염주를 든 스님은 지구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각각 다른 곳에 흩어져 있었던 에너지는 한 곳에 모여 시너지를 만들었다. 위기를 넘을 수 있는 힘은 그렇게 커지고 있었다.
■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 좋은 열매를 맺다
위기를 넘는 힘을 만드는 여정에 교회도 동참했다. 가톨릭기후행동을 비롯한 가톨릭 단체들은 이날 오전 12시 서울역 인근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고자 은총을 청했다. 천주교 거리미사를 주례한 유경촌(티모테오) 주교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씨는 어떠한 세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고 공부하면서 만물에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생활방식을 관철하는 사람, 즉 생태사도의 삶을 사는 이들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다”며 “오늘 우리의 미사와 행진이 헛되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맺고, 우리의 삶이 만물에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닮을 수 있도록 미사 중에 특별한 은총을 간구하자”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가 오늘 길거리에 모인 이유는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자녀로서 각자의 일상 속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맞게 잘 살아보자는 각오를 다지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각오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확인하면서 기후위기 시대에 걸맞는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이웃과 정부 당국에 촉구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1000여 명의 신자들은 뜨거워진 지구를 상징하는 붉은색 소품을 착용하고 기후정의행진에 함께했다. 풍물패의 흥겨운 풍물소리를 따라 행진하는 신자들의 손에는 ‘함께 사는 세상, 지구를 지켜요’, ‘기후 회복, 정의 회복’, ‘생명 있는 모든 것에 평화를’ 등이 적힌 피켓이 들려 있었다.
1살, 7살, 9살 자녀와 남편까지 다섯 식구가 모두 행진에 참여한 조아라(세레나·37·의정부 평내본당)씨는 “우리 아이들이 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로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곳에 나왔다”라며 “당장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외치는 목소리를 아이들에게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함께 왔다”고 전했다.
또래 친구 두 명과 함께 나온 이도담(리디아·10·서울 오금동본당)양은 “여름이 점점 더워지고, 봄과 가을이 짧아지는 것을 보면서 지구가 아프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며 “조금이라도 지구가 덜 아플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왔다”고 말했다.
성가소비녀회 한 아녜스 수녀는 “수녀회 안에서 기도하고 여러 실천을 하고 있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위기 속에 위기감을 느껴 모두가 함께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거리로 나왔다”며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갈 때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