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하루에 열 번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면 거기서 열 번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 빈첸시오 드 폴(빈첸시오 아 바오로) 신부는 “우리의 주인이며 스승”이라고 여기던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빈첸시오 신부는 성 루도비카 드 마리약(루이즈 드 마리약) 수녀를 만나 그 영성을 구현해나갈 수도회를 공동으로 창립했다. 바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다.
빈첸시오 신부가 태어난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종교적,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1562~1598년 사이에 벌어진 8차례의 종교 전쟁은 경제·사회 전반의 많은 것들을 파괴했지만, 귀족들은 막대한 세금을 걷어 여전히 부귀를 누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민중들의 삶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거리엔 거지들이 들끓었고, 농부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교회는 부유한 이들의 편에 서 있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빈첸시오 신부 역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사제가 됐다. 빈첸시오 신부는 폴빌에서 가난한 노인의 병자성사를 통해 영적 빈곤에 놓인 가난한 이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1617년 자신의 삶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헌하겠다는 서원을 했다.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체계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봉사단체를 설립했다.
빈첸시오 신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중 프랑스 전역에 전염병이 퍼져 병자와 고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 때 남편이 죽은 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던 루도비카 수녀에게 신심 깊은 여성들을 모으라고 부탁했고, 1633년 수도회를 설립했다.
루도비카 수녀는 귀족가문의 일원으로 살아오면서 익힌 지식을 활용해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했다. 회원들과 함께 프랑스 전역에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한 병원, 고아원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해나갔고, 빈첸시오 성인을 통해 활동하고 있는 조직들이 전문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활동을 통해 루도비카 수녀가 선종할 당시에는 프랑스 내에 이미 40개의 분원이 있었고, 가난한 이와 병자를 돌보는 구호소는 수없이 많았다.
수도회 설립자인 두 성인은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늘 그리스도를 향해 있었다. 루도비카 수녀는 생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며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라고 강조했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간 빈첸시오 신부와 루도비카 수녀는 1660년 같은 해에 선종했다. 빈첸시오 신부는 1737년 시성됐고, 1885년에는 모든 자선 단체의 수호성인이자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선포됐다. 루도비카 수녀는 1934년 시성돼 1960년에 모든 그리스도인 사회사업가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