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농촌 생활을 오십의 나이에 시작했습니다. 땀에 흠뻑 젖으며 밭에서 풀을 뽑다가 간간이 만든 화단에서 자라는 이름도 모르는 풀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갖가지 새소리에 눈뜨는 아침이면 제일 먼저 플라타너스를 만납니다. 또 게으름뱅이 생강, 익모초와 상추, 뒷마당에 질경이, 약수터 옆의 어성초, 은행나무를 돌아 개똥참외와 돌나물을 만나다 보면 가족들 생각에 울적했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거짓 없는 순박한 삶에 익숙해지면서 대자연 안에서 웃고 우는 어린아이처럼 차츰 순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눈 깜빡할 사이에 전기톱에 잘려 나갈 뻔했던 일과, 평온했던 채소밭에 커다란 비닐하우스가 들어서면서 진흙탕에 깔려 버린 고수며 비트를 비를 맞으며 서둘러 옮겨 심던 일 등, 생생한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여린 생명들을 보는 저의 마음은 생명 살림의 과제를 안고 농촌을 찾은 처음과는 다르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울먹이는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접어뒀던 서울살이를 다시 펼쳐보았으나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떠나온 농촌살이의 그 아름다운 기억의 아쉬움과 제가 어렵게 농촌으로 떠난 후, 보름도 안 되어 돌아가신 저의 든든한 후원자셨던 어머니가 없는 고향은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섭도록 공허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정신보건센터와 교육원, 노인복지시설 등에서 식물과 원예 활동을 통한 심신의 건강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 원예 요법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며 자연과의 만남을 이어갔는데, 그중 하나가 원예 요법을 겸한 재가 장기 요양보호 서비스였습니다.
어머니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후유증으로 ‘어머니’라는 그 말을 목이 메어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던 제가 처음으로 요양보호 서비스 대상자로 만난 어르신(여·89세·노인 장기 요양 1등급)은 말이 적은 저의 어머니를 뵙는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어르신은 평생을 고생하며 가난하게 사시다가 뇌경색 이후, 우울증과 치매로 2년간 누워만 계시면서도 자식 걱정으로 답답해하셨습니다. 하지만 수없는 칭찬과 위로로 용기를 드리는 말벗과 다양한 원예 요법을 겸한 가벼운 운동 등으로 차츰 스스로 거동할 수 있게 되어, 어르신은 물론 가족 모두가 평화를 되찾아가는 모습은 제게도 커다란 보람과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돌봄은 어르신이 구급차에 실려 아드님 품에서 조용히 임종하시는 순간까지 13개월 동안 제 어머니를 돌보는 듯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 돌봄 후, 언제부터인지 ‘어머니’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저를 보면서 이미 제게서 어머니 임종 후유증도 치유되었음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박영숙 마르타
제2대리구 명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