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3) 마해송 프란치스코 (상)
서재에서 마해송.
갑작스러운 죽음
마해송(프란치스코, 馬海松, 1905~1966)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아들 마종기 시인은 「아버지 마해송」이란 책을 냈다.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글로 가득하다. 마해송은 갑자기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기도 포천으로 친하게 지내던 한 군종 신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렸을 때 동행한 친구에게 집 쪽 성당의 높은 철탑을 가리키며 웃을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서점에 들러 미국에 사는 아들의 시가 실린 잡지 한 권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웃는데 얼굴 한쪽이 일그러졌다. 그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 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마해송은 그해 정월 초하루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유언을 남겼다. “공부도 재주도 덕도 부족한 몸으로 외롭단 인생을 외롭지 않게 제법 흐뭇하게 살고 가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묘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거기에는 마해송이 즐겨 쓰던 글이 새겨졌다. “어린이 사랑하는 마음 나라 사랑하는 마음.”
아들 마종기는 미국 의과대학에서 수련의 과정 중에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의학 공부하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장례식에 갈 수가 없었다. 비행기 표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이라고는 미국에 올 때 아버지가 준 50달러가 전부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다섯 해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묘소를 찾았다. 큰절을 올렸다. 아들은 머나먼 나라에서 아버지를 그리며 시 한 편을 지었다.
“아버님 다시 돌아가서/ 큰절 한 번만 받으시옵소서/ 5년 후에 보자고 큰절 한번 안 받으시고/ 돌아올 때 나가마, 공항에도 안 나오신/ 아, 그 담담한 미소의 악수 한 번/ 이제 아버님은 가시고/ 저는 너무나 멀리에 있습니다.”(‘아버님 영전에 올리는 시’에서)
아들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아버지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그의 시에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가끔 당신을 만나요/ 먼 나라 낯선 도시에/ 나는 지금 살지만/ 나를 찾아온 환자 중에서도/ 비슷한 윤곽, 안경과 대머리/당신은 미소하시겠지만/ 나는 말없이 반가워서 속으로 울어요.”
아버지 마해송의 묘소를 찾은 아들 마종기씨.
아동문학가이자 수필가
마해송은 개성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 이름은 창록(昌祿)이고, 법적인 이름은 상규(湘圭)였다. ‘昌祿’은 이름 쓰기가 어려웠고, ‘湘圭’는 그의 말대로 ‘맛대가리’가 없었다. ‘湘’ 자는 횟수가 많았고 글자를 써도 아래위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은 “상(湘) 자는 좋은 글자다. 소상강(瀟湘江)이라는 ‘상’ 자다”라고 했다. ‘소(瀟)’는 호남성에서 발원하여 상수(湘水)로 흘러가는 강이고, ‘상(湘)’은 광서성에서 동정호로 흘러드는 강으로 소상강은 중국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이다. 부친이 말한 ‘소상강’이란 단어에서 바다와 소나무를 생각해냈다. 두 글자를 합쳐보니 ‘해송(海松)’이 되었다. 이내 ‘해송’은 그의 이름이 되었다.
마해송은 개성학당을 거쳐 서울에서 중앙고보와 보성고보를 다녔다. 재학 중에 동맹 휴학 사건이 있었다. 3·1 독립운동 후에 학교에서 학생들이 존경하는 조선인 교사를 해고했다. 학생들은 반발했다. 마해송은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했다. 그리고는 그다음 해에 일본에 있는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다. 전공은 극문학(劇文學)이었다. 유학생 극단인 ‘동우회’를 조직해 방학 때면 귀국해 전국을 돌며 공연했다. 회원은 홍난파, 윤심덕, 오상순, 김우진, 홍해성 등이었다. 그들과 함께 우리나라 신극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방정환과는 색동회를 조직했다. 마해송은 「바위나리와 아기별」과 「어머니의 선물」로 이 땅에서 최초로 창작동화를 썼다.
그는 아동문학가이면서도 수필가였다. 수필집으로는 「편편상」, 「아름다운 새벽」, 「전진과 인생」이 있다. 그의 수필은 진실하고 솔직하기로 이름났다. 마해송은 대학 졸업 후에 일본 최대 종합잡지사인 ‘문예춘추사’에 입사했다. ‘문예춘추사’를 창간한 소설가 기쿠치 칸은 마해송의 스승이었다. 마해송은 니혼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다. 스승이 직장의 상사였던 것이다. 후에 마해송은 잡지사 ‘모던 니혼’을 인수했다. 그는 일본에서 뛰어난 경영자이며 편집자로 이름을 날렸다. 마해송은 해방 직전에 귀국해 작품 집필에만 전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만들었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이어 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헌장 前文) 마해송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6·25 전쟁과 4·19 혁명 등의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수많은 아동문학 작품을 써서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마해송은 열세 살에 부친의 강요로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재미가 없었다. 자신이 선택한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열다섯 살 때 기차에서 만난 네 살 연상의 초등학교 교사를 사모했다. 마해송은 그 여성에 대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사람이 차에 오르면 찻간은 갑자기 밝아졌고 한 송이 함박꽃이 거기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것 같아서 내 가슴은 부풀었다.’ 그 여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한 편의 연애소설과도 같다.
연애 사건으로 부친은 유학 중이던 마해송을 고향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집에서 못 나가게 했다. 마해송은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작품으로 만든 것이 「바위나리와 아기별」이었다. 바위나리는 꽃 이름이 아니라 바위에서 난 꽃이다. 동화는 바위나리와 아기별과의 애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해송은 어른은 언제나 어린이를 철부지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도 사람 대접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이를 이 땅의 어른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이것이 이 나라에서 어린이 운동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 사진 왼쪽부터 마해송, 차남 종훈, 부인 박외선, 딸 주해, 장남 종기. 출처=「아버지 마해송」
생사의 고비 넘기며
마해송은 일본에서 결핵에 걸려 해발 900m에 위치한 결핵 요양소에서 요양했다. 두 번째 요양했을 때는 피를 쏟았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1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요양소를 나오고 한 달 후에 예술가였던 여성과 결혼했다. 그 여성은 나중에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가 된 박외선이었다. 그녀는 마산여고 시절에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고 감동했다. 그 후, 일본 여자외국어대학으로 유학을 가 최승희가 소개해준 무용연구소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일본 전역을 돌며 공연했고,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렇게 일본 땅에서 조선의 현대무용가로 이름을 날렸다.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박외선 무용연구소를 찾아가 인터뷰할 정도였다. 귀국하자 6·25 전쟁이 일어났다. 박외선은 자식들을 데리고 마산으로 피난 갔다.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했다. 시장 개천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옷가지와 장신구를 펼쳐놓고 팔았다. 아들은 그런 초라한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창피했다. 그래서 개천가 다른 곳에서 어머니를 훔쳐보기만 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장터에서 꿀꿀이죽을 먹는 모습도 보았다. 가족에게는 깨끗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면서 자신은 냄새가 나는 더러운 음식을 먹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가슴이 메고 눈물이 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