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패망을 앞두고 ‘황군 지원병’ 열풍이 만주에 불어닥쳤다. 윤용하(요셉, 尹龍河, 1922~1965)는 장정으로 징집되었다. 훈련소가 있는 평양으로 가기 위해 열차에 탔다. 그런데 중간에 탈주했다. 일본 관헌들이 뒤를 쫓았다. 윤용하는 자진해서 평양훈련소로 입소했다. 훈련이 끝나면 전투가 치열한 남방 전선으로 간다. 윤용하는 그곳에 배치되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화장실로 가서 분뇨배출구를 통해 철조망 밖으로 도망갔다.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해방될 때까지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해방을 맞이한 곳은 북만주 어느 여인숙에서였다.
윤용하는 용정사범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학교 음악 선생이 여동생을 윤용하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보통학교 교장이었던 그녀의 부친이 극구 반대했다. 윤용하의 가정 배경과 학력, 음주벽이 이유였다. 그녀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용하와 함께 도망가 결혼식을 올렸다. 윤용하는 함흥으로 가 영생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함흥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어 쌀을 배급받으려면 음악 동맹에 가입해야 했다. 윤용하의 자유로운 사상은 사회주의 사상과 마찰을 빚었다. 아내와 함께 38선을 넘었다.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줘
윤용하는 서울에서 근근이 살아가다가 서울방송국(현 KBS)을 찾아갔다. 당시 시인 박화목이 문예 프로를 담당하고 있었다. 박화목은 시골 청년 모습을 한 윤용하를 보고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작곡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박화목은 윤용하를 어린이 프로에 동요 작곡가로 채용했다. 윤용하가 작곡한 수많은 동요가 방송을 통해 나갔다. 그러다가 6ㆍ25전쟁이 일어났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 동래 온천장 뒷산에 천막을 치고 살았고, 용두산 판잣집 동네에서 살기도 했다. 단칸방에서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부친과 동생이 함께 살았다.
환도 후에는 연희동 뒷산 중턱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교사 채용 공고를 보고 동북고 음악 교사로 취직했다. 윤용하의 머리는 곱슬머리로 늘 헝클어져 있어 학생들은 그를 ‘베토벤’이라 불렀다. 인터넷에 ‘윤용하’를 치면 늘 나타나는 사진이 있다. 태극기가 걸린 게양대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와 러닝셔츠 차림으로 맨손으로 지휘하는 모습의 흑백사진이다. 그 사진은 동북고 교사로 재직 시 애국가를 지휘하는 모습이다. 정부가 윤용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표를 발행했을 때 바로 그 사진을 썼다.
윤용하는 술 때문에 동북고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다시 단칸방으로 이사 갔다. 아내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버렸다. 그때 윤용하는 자신의 외로운 마음을 담아 ‘고독’이란 노래를 작곡했다. 윤용하는 이 노래를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동요 100곡 발표 축하음악회’가 명동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 윤용하는 생애에 가장 많은 꽃다발을 받았다. 그 꽃들을 남산 중턱 회현동 판자촌 단칸방으로 가져왔다.
윤용하는 힘들었던 삶과는 달리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라호 태풍 때였다.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신문사 데스크에 노숙자 차림의 신사가 나타났다. 입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어놓았다. 주소와 성명을 물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며 사라졌다. 담당자는 양복 상의 안쪽을 살폈다. 그랬더니 주머니 위에 ‘尹龍河’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렇듯 윤용하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는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줄 정도로 따뜻했다.
윤용하는 자식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다. 집안일에는 무심했으나 월급날이 되면 자식들을 위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바나나, 소고기 통조림, 과자를 사왔다. “아버지는 공원 입구에서 파는 삶은 달걀을 사서 돌 위에 앉아 껍질을 까주시며 동생과 내가 먹는 것을 바라보곤 하셨다. 그런데 왠지 아버지는 드시려 하지 않았다. 당신 입에 들어가는 건 하나도 사드시지 않았다.” 자식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자식들이 자고 있는데 “마리아! 마리아!” 하며 이름을 불렀다. 자식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중국 만두가 앞에 놓여 있었다. 자식들이 밥을 먹을 때는 꼭 생선 가시를 발라 주었다. 치킨을 사 와서도 꼭 뼈를 떼어내 주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아랫목은 자식들 차지였다. 윤용하는 언제나 차가운 윗목에서 잤다.
명곡 ‘보리밭’
운용하의 음주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시작되었다. 만주 봉천 시절부터 굳어진 음주벽은 평생에 걸쳐 그와 그의 가족을 괴롭혔다. 신경에서 생활하면서도 음주 행각은 여전했다. 주량과 빈도수도 늘었다. 돈만 생기면 밥보다는 술을 사서 마셨다. 당시 술은 배급제였는데 윤용하는 늘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술 배급을 받았다.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셨다.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그의 음주 행각은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그가 합창단을 지휘하던 때의 일이다. 단원들이 연습하기 위해 성당에 모였다. 그런데 지휘자인 윤용하가 나타나지 않았다. 단원들끼리 연습했다. 늦은 밤에 지휘자가 나타났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신부와 그를 아끼던 사람들은 화가 났다. 단원들은 험악한 분위기에 연습을 중단하고 귀가했다. 신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종아리를 걷으라고 하고는 총채로 종아리를 마구 때렸다. 시커멓게 피멍이 들었다. 윤용하는 말없이 맞았다. 음주벽이 절정에 달한 때는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술을 마셨다. 커피 마실 돈이 생기면 술을 사 먹었다. 점심 대접을 받으려면 술로 대접받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삼일절 행사에 참석했던 예술인들이 사무실에서 술을 마시며 파티를 벌였다. 한 예술계 원로가 일본말로 유머를 하고 사람들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웃고 떠들었다. 이때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윤용하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예끼, 이 빌어먹을…” 그리고는 파티 상을 뒤엎어버렸다. 윤용하는 그 원로에게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시오. 오늘이 무슨 날이오? 그래 민족예술을 지도한다는 양반이 하필 삼일절에 일본말로 후배들과 지껄인단 말이오? 에이, 한심한 것들!” 이렇게 말하고는 나가 버렸다.
어느 날, 윤용하는 아침밥도 못 먹고 남산 산비탈을 내려오다가 길바닥에 쓰러졌다. 갑자기 몹쓸 병이 찾아온 것이다. 병세가 악화되어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병원 구급차가 급히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 때가 이미 늦은 것이다. 명동대성당에서 신부를 모셔 왔다. 윤용하는 비좁은 움막 판잣집에서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누더기 이불로 가리고 있었다. 신부는 종부성사를 주었고 윤용하는 눈을 감았다.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리고 윤용하가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에 그렇게 갖고 싶었던 작곡집 「보리밭」이 출간되었다. ‘보리밭’ 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안형일, 황병덕, 엄정행, 백남옥, 조수미 등 국내 유명 성악가들이 ‘보리밭’을 불렀다. 그리고 문정선, 조영남 등의 유명 가수들도 ‘보리밭’을 불렀다. 그때부터 ‘보리밭’은 국민애창곡이 되었다. 어느 음악 평론가 말대로 보리밭은 ‘부르면 부를수록 또 부르고 싶은 노래’가 되었다.
참고자료 : ▲최용학 편 「천재 작곡가 이문근 신부와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 선생」, 한글, 2020 ▲박화목 「윤용하 일대기」, 범우사, 1981 ▲황인자 편 「국민예술가 윤용하」 나라사랑 팻송포럼, 2015. ▲가톨릭신문(2022.8.14.) ‘탄생 100주년 맞은 광복절 노래 작곡가 윤용하를 기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