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었다. 시인 천상병(시몬, 千祥炳, 1930~1993)이 갑자기 사라졌다. 친한 벗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해 주던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천상병을 찾아 나섰다. 그가 갈 곳이라고는 서울의 명동이나 종로 그리고 부산의 광복동이나 남포동밖에 없었다. 그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다. 그래도 천상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죽지나 않았을까?”, “아냐, 죽을 리가 없어. 천상병이 어떤 사람인데? 불사신이야!”, “돈도 없고 배도 고프고 병이 나서 한없이 떠돌다 쓰러졌는지도 모르지”, “참 안됐어. 시집 한 권 못 내고 세상을 뜨다니”, “언젠가 막걸리값으로 1000원을 달라는 걸 못 준 적이 있는데 후회가 되는군.” 친구들은 사라진 천상병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해서 친구들은 돈을 모아 천상병의 유고 시집 「새」를 만들었다. 시집은 큰 판형에 자주색 하드커버로 호화롭게 만들었다. 시집이 나오자 화제가 되었다.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시인의 시집을 가난한 시인들이 돈을 모아 출판했다고 언론에서는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천상병은 하루아침에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달려가 보니 그는 병원 침대에 앉은 채 그 특유의 ‘까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병명은 ‘신경황폐증’이었다. 천상병은 병원에서 여덟 달을 지냈다. 이렇게 해서 시집 「새」는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 시집’으로 문학사에 기록되었다.
시와 인간이 일치하는 시인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은 서울 인사동에서 전통찻집 ‘귀천’을 오랫동안 운영했다. ‘귀천’은 천상병이 목순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고, 배가 고팠던 그들 부부에게 밥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고마운 곳이었다. 그곳은 문인과 예술인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시인 신경림, 영화감독 이장호, 중광 스님 등 많은 문화예술인과 천상병을 사랑한 사람들이 즐겨 찾았다. 목순옥은 천상병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매일 ‘귀천’을 지켰다. 그러한 ‘귀천’이 문을 닫았다. 목순옥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 ‘귀천’은 없어졌지만 다른 ‘귀천’이 생겼다. 목순옥 조카가 인사동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소설가 김훈이 한국일보 기자로 있을 때, ‘귀천’을 자주 갔다. 그곳에서 천상병을 만났다. 김훈은 천상병의 어법, 걸음걸이, 웃음, 음색, 밥 먹는 모습, 조는 모습, 음악, 신발, 옷, 얼굴, 눈곱, 입가의 침버캐, 주머니 속의 1000원짜리 두 장, 선글라스 등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김훈은 천상병을 ‘시와 인간이 일치하는 시인’이라 했다.
가장 빼어난 서정 시인
또한 어떤 소설가는 천상병을 ‘하드웨어는 그렇게 생겼어도 소프트웨어는 깨끗한 눈(雪)과 같다’고 했다. 천상병의 친구 민영은 천상병을 ‘가장 빼어난 서정 시인이며 가장 순수한 방외인(方外人)’이라 했다. 민영이 천상병을 처음 만난 것은 부산 피란 시절이었다. 대청동에 있는 르네상스 다방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첫눈에도 천상병은 다른 문인들과는 다르게 보였다. 민영은 그때의 첫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뭣보다도 옷차림과 용모가 그러했다. 피난 때라 하더라도 모두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는데, 천상병만은 미군 군복에 물을 들인 검정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언제 세탁했는지도 모를 만큼 때가 끼고 구깃구깃한 군용 상의, 그 위에 얹힌 조물주가 빚다 만 진흙덩이같이 생긴 얼굴. 목소리는 무쇠를 삼킨 것처럼 크고, 이따금 남의 이목을 가리지 않고 웃어젖히는 까치 웃음… 그 꼴은 옛 그림에 나오는 한산(寒山)·습득(拾得) 못지않았다.”
친구들은 천상병의 재기 넘치는 말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천상병은 선후배를 막론하고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어 세금(술값)을 요구했다. 그러면 거절하지 않고 주었다. 요구하는 술값이 막걸리 한 잔 값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해도 행복
천상병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천석꾼이었던 그의 부친이 일본인의 사기에 휘말려 재산을 전부 잃고 일본에 건너가 살았기 때문이었다. 천상병은 중학교 2학년 때에 해방을 맞았다. 귀국해 경남 마산에 정착했다. 마산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뒷산에 올라갔다가 사람들이 무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시로 썼다. ‘강물’이라는 시였다.
당시 그 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인 김춘수가 천상병의 담임이었다. 김춘수는 천상병의 시를 보고 감성의 뿌리가 살아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 시는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문예’ 지에 실렸다. 중학교 5학년(현재 고2) 학생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천상병은 중학교 6학년(현재 고3)이 되자 대학 진학을 놓고 고민했다. 문과가 적성이었으나 이미 시인이 되었기에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선배의 말을 듣고는 대학에 있는 학과들의 이름을 종이쪽지에 적어 돌과 함께 힘껏 던졌다. 가장 멀리 날아간 돌에 적힌 내용대로 대학에 가기로 한 것이다. 가장 멀리 날아간 돌의 쪽지를 펼쳐보니 ‘서울대 상대’가 나왔다. 그래서 서울대 상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입학 후, 학과 공부보다는 문인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천상병의 본거지는 부산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와 ‘돌체’였다. 그는 무척 감성적이어서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의 눈물을 보려면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신청하면 되었다.
아궁이 속 조의금
천상병은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았다. 한잔의 커피와 한 갑의 담배, 한 사발의 막걸리, 그리고 버스값만 있으면 하루가 행복했다. 그는 가난을 직업처럼 살았다. 시 ‘나의 가난은’에서 가난한 삶을 보란 듯이 노래했다. 가난을 노래한 또 다른 시가 있다. ‘소릉조(少陵調)’라는 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계시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다. 자신만 홀로 서울에 있다. 부모님 산소에 가고 싶고 부산에 있는 형제들도 보고 싶은데 그곳에 갈 여비가 없다. 죽어서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자신은 영영 죽을 수 없다는 내용의 시다. 눈물 속에서도 웃음이 피어나는 슬프디슬픈 시다.
천상병은 아내에게 매일 2000원씩 용돈을 타서 썼다. 이 돈으로 가게에서 맥주 한 병,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버스 토큰 서너 개와 담배를 샀다. 그러고도 어떤 때는 돈이 남아 저축도 해 통장에 100만 원 가까이 들어 있기도 했다. 천상병은 그 돈으로 같이 사는 장모의 장례비 30만 원을 떼어낼 생각이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문학청년의 결혼 비용으로 50만 원을 쓸 계획이며, 나머지는 처 조카딸 결혼 비용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장모의 장례비를 걱정하던 천상병은 장모의 장례비를 미리 준비해 놓고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의 장례식이 끝나자 장모는 들어온 조의금을 잘 보관한다며 천상병이 자던 방의 빈 아궁이에 돈뭉치를 신문지에 싸서 넣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천상병의 아내는 날씨가 쌀쌀하고 비도 내려 남편이 추울 것으로 생각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조의금으로 들어온 수백만 원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다행히 그 재를 은행에 가져가니 얼마간 주었다. 결국 그 돈은 장모 장례비가 되었다.
동백림 사건에 연류, 고문을 당하다
시인 신경림에 따르면 천상병은 몸이 워낙 튼튼해서 아무리 술을 마셔도 탈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어디서나 밥을 먹어도 남기지 않고 바닥까지 다 긁어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은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이후에는 볼 수가 없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란 서베를린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에 구경 간 사건을 말한다.
당시 독일은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동쪽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서쪽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서슬이 시퍼렇던 국내 반공법(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연루자 전원을 체포해 한국으로 송환했다. 재판부는 이들 유학생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내렸다.
그런데 아무 연고도 없는 천상병이 엉뚱하게 연루되었다. 천상병은 억울하게도 중앙정보부에서 3개월, 교도소에서 3개월 고생하다가 풀려났다.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지독한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받았다. 전기고문을 받을 적마다 까무러쳤다. 그 후유증으로 치아가 거의 빠졌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갔고, 아이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천상병은 ‘그날은’이란 시를 써서 자신이 겪은 무시무시한 고통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이론(다리미) 밑 와이셔츠같이’ 고문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