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가 가톨릭 신앙을 갖기로 결심한 후부터 세례받을 때까지 몇 년 걸렸다. 이유는 동네에 성당도 없었고 성당으로 인도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일에 명동대성당에 가보긴 했으나 신앙과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잠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 아파트 단지 내에 성당이 있었다. 그해 성탄절이었다. 텔레비전에 성탄절을 맞은 명동대성당의 모습이 나왔다. 갑자기 성당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아파트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상가 4층에 자리 잡은 성당이었다. 신자들도 너무 많아 복도와 계단까지 꽉 찼다. 무질서했다. 그런데 미사가 시작되자 질서가 잡히며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거의 세 시간 동안 성탄 자정 미사를 봉헌했다. 구유 경배 예절까지 하고 나왔다. 밖은 무척이나 추웠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뜨거운 기쁨과 감동이 용솟음쳤다. 그 후, 같은 단지에 사는 교우의 권유로 교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다. 어떤 사람이 박완서에게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지면 소설을 못 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완서는 ‘생명력 있는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문학과 종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통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요한 복음서 가장 좋아해
박완서가 신약 성경을 처음 통독한 것은 마흔을 바라볼 때였다. 성경 통독은 종교적인 갈망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시작했다. 박완서는 복음서 중에 요한 복음서를 가장 좋아했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서는 서술이 특이하고 힘이 있고,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다른 복음서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고결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용기를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박완서는 복음을 읽을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놀랍고도 황홀했다. 또한 박완서가 가장 좋아한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였다. 그 말씀은 ‘예수님과의 첫사랑’이었으며 ‘예수님께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또 좋아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식탁에 초대했다는 말씀이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거지, 장애인, 세리, 매춘부로 당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깊은 위로와 용서를 받았다. 특히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할 생각도 감히 하지 못하고 그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물끄러미 예수님만 바라보던 세리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반면에 성경을 읽었을 때 이치에 맞지 않아 화가 났던 말씀도 있었다. 바로 하늘나라를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비유한 마태오 복음이었다. 하루 종일 일한 일꾼, 반나절 일한 일꾼, 오후 늦게 일한 일꾼 모두에게 동일한 임금을 준 것은 화가 났다. 분명히 불공평한 일이었다. 박완서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왜 그들은 온종일 일자리를 못 얻었고 서성거리고만 있었을까. 겉모습이 초라해 보였거나 몸이 약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주인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박완서는 그런 불쌍한 일꾼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꼴찌 인생들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라 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인연
박완서는 서울성모병원에 입원 중인 이해인 수녀에게 문병 갔다. 그런데 같은 병동에 김수환 추기경이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꼭 뵙고 싶었다. 그러나 병이 위중해 문병을 사양한다고 하고 또한 편안한 안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뵙기를 단념했다. 박완서는 예전에 어느 신문사 초대로 러시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구경하러 갔었다. 2층의 자리였다. 김 추기경도 초대받아 그곳에 앉아 있었다. 박완서는 추기경과 나란히 공연을 관람했다.
추기경은 제의(祭衣)가 아닌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무척이나 가볍고 작은 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공연이 끝나자 추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뜨겁게 박수쳤다. 계속해서 박수쳤다. 박완서 표현대로 ‘연예인에 열광하는 청소년’과 같았다. 박완서는 추기경의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그 후, 박완서는 추기경을 모시고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에 서 있던 추기경은 옆으로 비켜서며 박완서에게 먼저 타라고 했다. 사양하자 “레이디 퍼스트!”라고 했다. 박완서는 그런 말에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먼저 탔다. 그러면서 추기경에게 “영 레이디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추기경은 “나보다 영(Young)이지요” 했다. 박완서는 추기경의 이러한 모습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유머를 느꼈다.
박완서는 추기경을 만날 때마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연상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할아버지 곁에 앉는 것을 어려워해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완서는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아 늘 같은 밥상에 앉았다. 추기경과 함께 식사할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박완서는 추모하는 글을 썼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시고 나서 접하게 된 그의 어록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바티칸은 지구 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가 전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제로에 가깝지만,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무한대다.’ 그게 바로 가톨릭 정신이라면 김수환 추기경님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박완서는 서울주보에 ‘말씀의 이삭’을 3년 동안 연재했다. 그 글을 시작할 때 교만한 마음에서 쓰기 시작했다. 세례받은 지 15년이나 되는데 그동안 봉사한 적이 없었다. ‘말씀의 이삭’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도 봉사라는 거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런데 신앙 글은 글재주만으로 써지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부터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을 했더니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쁘고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박완서는 노년을 경기도 구리 아치울에서 보냈다. 그곳 토평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성당 1층 작은 쉼터에 자신이 소장한 책을 기증해 본당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박완서는 지병인 담낭암으로 여든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 미사는 토평동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이해인 수녀가 추모 기도를 했다.
“생명의 하느님/ 진실하고 따듯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한 생을 마감한 우리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참고자료 :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2004 ▲박완서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열림원. 2008.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세계사. 2020 ▲공선옥 외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생활성서. 2007 ▲평화신문 엮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백형찬 「나의 아름다운 벚꽃동산」 태학사. 2018 ▲백형찬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태학사. 2015. ▲평화신문(2011.1.30.) ‘한국 문학계 큰별 박완서 작가, 주님 곁으로’ ▲가톨릭신문(2011.1.30.) ‘고 박완서 작가 삶과 신앙’ ▲오광수. 「박수근」 시공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