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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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영혼이 깃든’ 동화작가 정채봉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7) 정채봉 프란치스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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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정채봉 작가는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담은 글을 신문에 연재했으며,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이와 난 닮은 점이 참 많다. 어려서 엄마와 아버지를 잃은 것이 같고 글을 써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 또한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사랑스런 딸이 있어 행복했다는 것이 똑같은 축복일 것이다. 그 역시 나처럼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 받은 것이요, 많은 결점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피천득)

“그날 병실을 나오면서 나는 그를 안아 주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것이 이 생에서 우리 사이에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된 셈이다. 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뼈만 남아 앙상한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몇 차례 길가에 차를 세워야 했다. 살아서 다시 만난 날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법정)



정채봉과 법정 스님

정채봉(프란치스코, 丁埰琫, 1946~2001)은 존경할 수 있는 스승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라고 했다. 그는 피천득과 법정 스님을 존경했다.

정채봉이 법정을 처음 만난 것은 ‘샘터’였다. 신입사원이었던 정채봉은 법정의 원고를 받으러 한강 건너 봉은사 다래헌으로 찾아가곤 했다. 법정은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으로 옮겨가서도 「샘터」에 글을 썼다. 그런데 글에서 오자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법정은 기분이 상했다.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원고를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정채봉이 갑자기 찾아왔다. 사과하려고 밤차를 타고 내려온 것이다. 풀이 죽어있는 모습을 본 법정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고는 함께 부엌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었다.

그러던 어느 해 봄에 정채봉은 법정에게 소포를 보냈다. 그 속에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스님의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하면서 할머니 이야기를 썼다. 할머니는 손자를 키우면서 절 구경을 다니고 싶어 했다. 절을 가려면 여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푼 두푼 돈을 모았다. 여비가 어느 정도 모이면 정채봉은 ‘이다음에 제가 돈 벌면 절에 모시고 갈게요’라는 말을 하며 돈을 가져갔다. 그런데 할머니는 정채봉이 첫 월급을 받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첫 월급을 타던 날, 누군가가 어머니 내복을 사 드리라고 했다. 그런데 내복을 사드릴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스님의 생신 선물로 무엇을 살까 생각하다 내복을 샀다. 스님이 자신의 마음을 짚어 주리라 믿은 것이었다. 법정은 마루에 앉아 보내온 내복을 만지면서 편지를 두 번이나 읽었다. 그 후, 정채봉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고 나서 법정에게 편지를 썼다. “기억에 없는 어머니와의 첫 만남이 유골로 이루어지게 되어 눈물을 좀 흘렸습니다. 저의 나이 든 모습이 스무 살의 어머니로서 가슴 아파하실까 봐 머리에 검정 물을 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법정은 마루에 앉아 편지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성모자상에 늘 인사

정채봉은 샘터사에 있을 때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원의 난지도 분원을 방문했다. 그 수도회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수도와 전교로 삼는 곳이었다. 두 수녀가 난지도 사람들과 함께 쓰레기 뒤지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수녀들이 사는 집은 세 평의 간이 막사였다. 한 평에는 현관과 부엌이 있고, 또 한 평에는 숙소가 있으며, 마지막 한 평에는 성당이 있었다. 그 작은 성당에 성탄 때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헌 바구니에 아기 예수님이 누워있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 그곳 수녀가 정채봉이 일하는 곳을 찾아왔다. 수녀들이 농한기에 빚었다는 성모자상을 선물로 놓고 갔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갈색 점토로 빚은 것이었다. 그 성모자상을 집으로 모셔 왔다. 그러고는 출근할 때마다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또한 술에 취해 들어와서도 “한잔했습니다”하고 인사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해 집에 왔는데 큰아이가 “동생이 성모자상을 넘어뜨려 아기 예수님한테 상처가 났어요”라고 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기 예수님의 어깨에 금이 가고 거기에 접착제가 발라져 있었다. 정채봉은 화가 나서 아이 방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성모자상에 상처를 낸 작은아이가 구석에서 쪼그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의 등을 잡아 일으켰더니 아이의 손바닥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묵주였다. 아이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어린 시절 이야기를 책으로

정채봉은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 글은 소년한국일보에 ‘저 산 너머’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그 후에 「바보 별님」으로 출간되었다가 다시 「저 산 너머」라는 책으로 나왔다. 정채봉은 책 속에서 “그분(김수환 추기경)을 우리가 가야 할 내일의 길에 길잡이 등불로 삼을 수 있다면, 그리고 ‘저 산 너머’의 세계까지도 알 수 있게 하는 만남이 된다면 얼마나 큰 복이겠느냐.”고 했다.

김 추기경은 정채봉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군위를 방문했다. 그곳을 걸으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사람한테는 세 사람의 자기가 있지요. 한 사람은 남이 아는 자기이고, 또 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자기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이지요. 바라건대 제가 이 일(‘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동안 남들이 아는 나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나보다도, 내가 모르는 내가 진실로 나타나서 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정채봉은 이렇게 꾸밈없고 순박한 추기경의 모습에 깊이 감동했다.
 
류시화 시인과 정채봉 작가


 
1993년 평화신문 제3회 신앙체험수기를 심사하고 있는 정채봉(오른쪽)과 정호승 작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정채봉을 낳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내음은 기억한다.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해송(海松) 타는 내음이 어머니 내음이었다. 어린 채봉은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돌을 차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중학생 때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글을 지었다. 담임선생은 가정을 방문해 할머니에게 정채봉이 쓴 글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집에 돌아온 손자에게 할머니는 장롱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지로 곱게 싸여있는 낡고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정채봉의 표현대로 ‘둥근 턱에 솔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멍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 같은 여인’이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네 어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하고 죽었어.”

정채봉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란 시를 지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좋겠다고 했다. 아니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만이라도 아니 ‘반 시간’만이라도 그래도 안 된다면 ‘단 5분만’이라도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단 5분만 만나도 ‘원이 없겠다’고 했다. 엄마를 만나면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숨겨놓은 세상사 중’에서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엄마에게 일러바치고는 ‘엉엉 울겠다’고 했다. 정채봉을 ‘형’이라 부른 시인 정호승(프란치스코)은 이 시를 읽고 가슴은 눈물로 가득 찼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런 시를 썼을까,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도 엄마를 부를까 싶어 목이 메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의 끝 부분에 가서는 그만 가슴 밖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 했다. 정호승은 정채봉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혼이 깃든 시인’이라 했다.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따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기에 힘들게 발견한 네 잎 클로버 잎마저 따지 못한 시인이 바로 정채봉이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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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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