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새로 착공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경 성 베드로 사도 묘 위에 세워 준 옛 성 베드로 대성전(Old St. Peter‘s Basilica)이 있었다.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은 40년에 걸쳐 바실리카식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로마 시대의 바실리카와는 크게 달랐다. 얼마나 달랐을까?
성당에 이르기 전 높은 계단이 있었고 그 위에 문이 세워져 있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로마의 바실리카에는 없던 안마당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바닥을 돌로 깐 넓은 마당을 지나면 비로소 성당 건물의 서쪽 끝에 이른다. 이때 앞마당과 성당 내부를 구분해 주는 방이 나타난다. 나르텍스(narthex)라고 부르는 문랑(門廊)이다. 이 문랑을 지나면 천장이 목조 트러스로 되어 있는 5랑식 넓은 회중석이 나타난다.
내부의 전체 길이는 119m, 회중석의 길이는 90m, 폭은 64m였는데, 3000~4000명이 들어갔다고 한다. 명동대성당보다 2배 길고, 3배 넓다. 가운데는 높이가 32m인 중랑(中廊), 그 좌우에는 이보다는 낮은 측랑(側廊)이 덧붙여졌다. 목재로는 전체를 덮는 지붕을 만들 수 없어서 일단 높은 중랑을 두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측랑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중랑과 측랑의 지붕 높이에 차이가 생겨서 중랑 위에 둔 고창층으로 내부에 빛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바실리카 형식은 그 이후 중세 대성당으로 이어졌다.
1500년대에 그려진 자료를 보면 중랑 좌우에는 22개의 원기둥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는 모자이크 그림이 그려진 엔태블러처가 제단을 향하는 수평의 방향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측랑에는 이와는 달리 열주 위에는 엔태블러처가 아닌 아치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원기둥은 녹색, 붉은색, 노란색, 회색 등 여러 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성 베드로의 묘 위에 만든 발다키노가 중심축 끝에 놓였는데, 반원 제단이 그 뒤를 두르고 있었다. 이 반원 제단과 회중석 사이에 넓고 긴 횡랑(橫廊)이 덧붙여져서 평면 전체는 라틴 십자형을 이루게 되었다. 횡랑과 회중석은 개선문 아치로 분리되어 있었고, 횡랑과 측랑이 만나는 곳에는 열주 스크린으로 구분했다. 다른 성당과 달리 횡랑이 독립적인 것은 이것이 성 베드로의 묘를 공경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고, 기념 미사에서는 성단소처럼 사제 전용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는 아마도 이동식이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입당행렬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을 그린 그림을 보며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어떻게 성당에 모여 안으로 들어갔는가를 상상해 보자. 그들은 이렇게 길에서 시작하여 성당의 제단에 이르는 성당 건물의 위계적인 통로를 따르는 정교한 행렬로 미사를 준비했다. 오늘날에는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 있다가 입당행렬을 하면 미사가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당을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이미 도시의 길에서 행렬은 준비되고 있었다. 그들에게 행렬은 거룩한 삶으로 들어가는 실제의 의례 행위였다. 성당 앞에 이르러 프로필레아라 부르는 입구에 들어서서 베스티뷸을 지나면 앞마당에 이른다. 앞마당은 기둥이 연속해서 이어지는 열주랑이나 아치가 연속해서 이어지는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마당을 아트리움이라고 한다. 세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든 신자는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칸타루스(cantharus)라고 하는 분수가 놓여 있었는데, 신자들은 이 흐르는 물에 손과 발을 씻었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기 전 죄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상징했다.
신자들은 성당 밖 널찍한 앞마당에 모여서 주교와 황제의 행렬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때 주교와 황제를 포치나 나르텍스에서 만나 성당에 들어갔다. 그 뒤를 복음집을 든 부제, 공동 집전자, 주례 사제, 황제 근위병과 황후와 시종이 따라갔다. 평신도는 사제와 고위 관리가 들어간 후에 입당행렬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상할 것 없다. 그 건물이 성당으로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평신도의 회중이 입당했을 때이고, 이렇게 회중이 모였을 때 하느님 백성으로 이루어진 ‘에클레시아’가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긴 행렬은 중랑을 지나 제단으로 이어졌다. 주교가 제단에 올라가면 그 뒤를 황제가 따랐다. 황제는 봉헌물을 바치고 곧장 북쪽 측랑에 마련된 단으로 높인 자기 자리로 옮겼다. 이 자리에 앉은 황제는 제단과 회중석에 앉는 신자들을 잘 볼 수 있었다. 동쪽 끝 반원 제단에는 주교와 주례 사제가 신트로논의 가장 위 계단을 차지하고, 아래 단은 다른 사제, 부제 등이 앉았다. 바실리카식 성당이 그 이후 기본형이 된 것은 전례 행렬을 빠르고 깊게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룩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지어진 초기 성당에서 신자들은 경쟁하듯이 중랑이나 측랑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보면 꽤 공간적으로는 개방적이었고 신자 쪽에서 보면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런 원칙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권력 있는 자들이 앞에서부터 제단에 가깝게 앉았다. 신자들은 중랑에서도 남녀로 나뉘어 있었다. 시리아에서는 중랑과 측랑을 커튼으로 가려 신자들을 구분했고, 제단과 회중석도 커튼으로 가렸다. 중랑의 아케이드 위에 갤러리 또는 트리뷴이 있는 경우에는 여자 신자들은 이곳에 자리 잡았다. 아직 세례를 못 받은 예비 신자들은 ‘신자들의 전례’가 시작할 때 회중석에서 물러나기를 요구받고 갤러리(또는 트리뷴)나 문랑에 나가 있었다.
바실리카식 성당에는 긴 평면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을 향하는 종교적 경험을 물리적인 공간이 분명히 말해주는 것에 시각적인 힘이 있다. 이 성당에 들어서면 눈은 긴 중랑 아래에 이끌리어 반원 제단 위에 약간 멀리 놓인 제대를 향한다. 이때 중랑 좌우의 긴 열주랑은 하느님께서 제단을 향해 초대하시는 부름을 확장해준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긴 중랑을 따라 제대를 향하는 여정의 귀중함을 생각하게 하고, 제대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영적인 상황을 생각하게 해 준다.
이때 주교단과 황실은 장대한 입당행렬로 자신 있게 다가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평신도를 포함한 수많은 다른 이들은 긴 중랑을 천천히 걸으며 거룩한 힘의 중심인 제단을 향해 겸손하게 경외심을 가지고 두려운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것이다. 제대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제대에 가까이 가야 하나, 그렇게 가까이 가기 전에 또는 가까이 가면서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를 건축 공간이 묻고 있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신자들이 들어서자마자 금방 나타나는 건물이 아니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긴 축을 따라 지성소에 이르러 의미 깊은 여정을 마치게 이끌도록 설계된 건축 형태다. 신자들에게는 바실리카식 성당의 서쪽 정문을 들어서는 것은 자신이 거룩한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고, 초자연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이어지는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하느님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완벽한 건축적 환유(換喩)이자 은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