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역사가 브루노 제비(Bruno Zevi)는 그의 명저 「공간의 건축」에서 로마의 바실리카와 특별히 산타 사비나 대성전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다. “트라야누스 바실리카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라. 제일 먼저 문랑(門廊)에 들어선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중의 열주랑을 보게 되겠지만, 너무 넓어서 전체를 한눈에 다 볼 수 없다. …그 공간에 들어가 감탄하며 걷다가 떠날 수는 있겠지만, 그 공간과 함께했다는 감각은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산타 사비나 성당에서는 …긴 축으로 배열된 공간 전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걷고 있는 사람에 따라 설계되어 …그곳에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의미를 느낀다.”(83쪽)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은 건물들은 평면으로만 알려졌을 뿐 지금은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5세기의 바실리카인 산타 사비나 대성전(Basilica di Santa Sabina all‘Aventino)은 시간을 거듭하며 장식이 많은 내부로 개조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원래의 모습대로 대부분 복원되었다. 한마디로 이 성당은 로마 제국의 바실리카에서 직사각형 평면에 원기둥을 가진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는 초기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또한 이 성당은 로마에서 가장 잘 보존된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이기도 하다. 지금은 1222년부터 도미니코 수도회에 속해 있다.
이 역사적 성당은 로마의 중심에서 티베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벤티노 언덕 꼭대기를 따라 서 있다. 1세기에 이 언덕은 몇몇 중요한 사원과 귀족들의 집이 있는 부유한 동네였다. 성녀 사비나는 이런 곳에 살던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성당 바닥의 쇠창살 아래로 고대 로마 주택의 발굴된 방이 보인다. 이것으로 성녀 사비나의 집인 티툴루스 사비나에(Titulus Sabinae)의 자리에 주택 교회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티툴리란 개인 주택 등에 회중이 모였던 초기 성당을 말한다.
전승에 따르면 성녀 사비나는 114년에 순교했으며 5세기에 그녀의 집터에 세워진 성당으로 그녀의 유해가 옮겨졌다. 반원 제단에서 바라보이는 벽에 있는 원본 모자이크로 쓰인 글에 따르면, 첼레스티노 1세 교황이 로마의 첫 주교인 일리리아의 페트로스에게 티툴루스 사비나의 터에 성당을 짓게 했으며, 8년이 지난 432년에 봉헌되었다고 한다. 이에 페트로스는 이 성당을 짓는 비용을 아낌없이 부담할 정도로 상당히 부유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외벽은 모두 벽돌벽이다. 돌출된 제단이나 수랑(袖廊)이 없어서 외관은 단순하여 그리 특이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원형 제단의 외벽은 중랑보다 약간 낮고 좁을 정도로 크고 높게 둘러싸여 있다. 성당 안에는 의자가 전혀 없이 텅 비어 있다. 너무 단순하여 성당 건축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으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려니 하고 지나쳐 버리기 쉽다. 그러나 이 대성전의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자. 원기둥은 제대를 향해 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의 아치도 열을 이루고 있다. 아치 위에는 조그만 모자이크의 수평 띠가 긴 수평선을 긋고 있다. 그 위의 수평 벽도, 또 그 위의 커다란 창들도 긴 수평의 열을 이룬다.
코린트식 대리석 원기둥 좌우 12개씩 배열
원기둥도 자세히 보자. 원기둥의 위아래는 색깔도 다르고 장식 세로홈(플루팅, fluting)도 다르다. 위의 삼분의 이는 홈이 굵게 파였는데, 아래의 삼분의 일은 위에 있는 홈을 다시 둘로 나눠 좁게 팠다. 이렇게 만드니 기둥의 하반부는 단단해 보이는 수평의 띠를 만들게 되었다. 열을 이룬 원기둥의 머리와 고창의 열은 각각 반원 제단의 벽, 그 위에 있는 창과 이분의 일 돔을 가르는 짙은 선에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수직의 모든 요소도 열을 이루며 제대를 향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부 공간은 고요하며 엄숙하면서도 과도하게 크지 않고 친숙한 스케일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내부 공간은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의 정신을 고양해 주고 있다.
회중석은 3랑식인데 측랑이 좁아서 ‘랑(廊)’이 한 개인 고전적인 바실리카식으로 느껴진다. 회중석의 길이는 46.8m, 반원 제단의 깊이는 7.2m, 폭은 24.8m이다. 원기둥의 높이는 지름의 9.5배이고 기둥 사이의 간격은 지름의 5배다. 이렇게 비트루비우스가 설명한 그리스 건축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중랑의 원기둥은 정교한 코린트식 기둥머리가 있는 대리석 원기둥이 좌우 12개씩 24개 늘어서 있다.
410년 서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했을 때 이 지역은 인구가 줄고 있었으므로, 이 원기둥들은 5세기 중반에 무너진 이 언덕의 어떤 건물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커다란 수평 석재를 입수하기 어려워서 고전 로마 건축처럼 열주랑이 수평의 엔태블러춰를 지지하지 않고 반원 아치를 사용했다. 이는 로마에서도 아주 일찍 나타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원기둥에 다시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황실의 건설업자 상점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고 보기도 한다.
측랑 벽에 있는 아치형 창은 아주 좁은 슬릿이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버팀벽이 없이 힘을 받아야 하는 측랑의 벽은 개구부를 최소로 만들어 안전한 구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성전의 공간은 이상하게도 중랑 좌우의 벽은 가볍게 느껴진다. 또한 내부는 다른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과 달리 큰 창으로 빛을 상당히 많이 받게 했다. 고창층과 반원 제단의 창이 특이하게 크다. 목재 천장이나 그대로 보이는 트러스 지붕으로 만들고 그것을 받치는 중랑 상부 벽에 이만한 창을 과감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대단한 시도였다. 창문은 양 측면에 13개, 반원 제단에는 3개, 입구 위는 5개가 있다. 성당의 창은 ‘트란세나(transenna)’의 기하학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로마 또는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을 특징짓는 중요한 장식 형태인데, 그중에서도 이 성당의 ‘트란세나’가 가장 유명하다.
성당 내부의 벽은 모두 모자이크로 빛나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 무덤 성당을 순례한 순례자의 글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원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지어진 대성전 내부는 호화로웠다. 그런데도 산타 사비나 대성전은 이 시대에 로마에 지어진 성당으로서는 입구 위의 벽에만 모자이크가 남아 있을 뿐, 드물게 반원 제단에 모자이크가 없다. 그러나 17세기의 설명에 따르면 훨씬 더 많은 모자이크가 남아 있었으며, 본래 반원 제단을 포함한 네 벽에도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마디로 성당 내부의 벽은 모두 모자이크로 빛나고 있었고, 따라서 공간은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음에 틀림이 없다.
고창을 크게 내지 못하여 내부가 상당히 어두웠던 로마네스크 성당과 비교하면, 산타 사비나 대성전의 건축가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빛의 효과를 이렇게까지 많이 의식하고 있었음에 감탄하게 된다. 브루노 제비의 말대로 대성전의 밝은 빛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체계를 창조했고 그 요소에 새로운 정신과 기능을 주었다. 이것이 로마의 바실리카를 바꾸어 만든 바실리카식 성당의 본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