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로는 종종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욥의 경우를 봅시다.
욥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습니다.(욥 1,1 참조)
하느님께서도 욥을 땅 위에 다시 없을 사람으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욥 1,8 참조)
그런데 사탄은 욥의 의로움에 불순한 동기가 숨어있을 수 있다고, 즉, 의로운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복 때문에 욥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익을 위한 욕망에 이용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에 대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 결과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마저 잃습니다.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친구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가 찾아옵니다.
방문의 목적은 위로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에게 닥친 이 모든 불행에 대하여 듣고, 저마다 제 고장을 떠나왔다. 그들은 테만 사람 엘리파즈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초바르였다. 그들은 욥에게 가서 그를 위안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욥 2,11)
친구들이 고통 중에 있는 욥 앞에서 첫 번째로 취한 태도는 침묵입니다. 그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욥 2,13)
때로는 침묵이 가장 좋은 위로 혹은 유일한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결국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주려 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욥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욥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면 고통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 죄가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욥의 고통을 가중할뿐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는 데 실패합니다.
“자네들은 모두 쓸모없는 위로자들이구려.”(욥 16,2)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변호자를 자처하며 위로자 대신 고발자가 되어버린 친구들을 비난하시고,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 42,8)
비록 하느님께서 욥의 고통의 원인을 밝히지는 않으시지만, 적어도 친구들의 말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욥의 자녀와 재산을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돌려주심으로써 그를 위로하십니다.
이렇게 욥기는 진정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욥을 위로하신 다음 그제야 가족과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답시고 몰려오는 장면은 해학적입니다.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과 옛 친구들이 모두 그의 집에 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들이닥치게 하셨던 모든 불행에 대하여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며, 저마다 은전 하나와 금 고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욥 42,11)
시편은 위로자를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
코헬렛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보라,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 폭력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코헬 4,1)
이것은 코헬렛 저자 개인만의 말이 아니라, 기원전 587년 나라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겪은 유다 백성 전체의 절망적 부르짖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애가도 정복당하고 파괴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두고 한탄합니다.
“시온이 두 손을 내뻗었건만 위로해 줄 이 아무도 없다오.”(애가 1,17) “그들은 제가 탄식하는 것을 듣건만 아무도 저를 위로해 주지 않습니다.”(애가 1,21)
어떤 사람에게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어 절망에 빠진 이들을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참으로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버려짐,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심으로써 위로해 주십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