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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부는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겼다. 사진은 「천주성교공과」 절두산순교성지 소장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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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견진·고해·성체성사 등 4가지 근본 교리를 154조목으로 나눠 문답식으로 설명한 「성교요리문답」. 한문본인 이 교리서를 최양업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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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부는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 섰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 천주가사 중 공심판가를 옮긴 필사본. 가톨릭평화신문 DB |
한문 기도문 음으로만 읽어“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해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1838년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처음으로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펴내기 전까지 조선 교회 신자들은 한문 기도문의 뜻을 풀이하지 않고 소리(音)만을 옮겨 입으로 외었다. ‘주님의 기도’를 “재천아등부쟈(在天我等父者) 아등원(我等願) 이명현성(爾名見聖) 이국임격(爾國臨格) 이지승행어지(爾旨承行於地) 여어천언(如於天焉) 아등망(我等望) 이금일여아아일용량(爾今日與我我日用糧) 이면아채(而免我債) 여아역면부아채자(如我亦免負我債者) 우불아허함어유감(又不我許陷於誘感) 내구아어흉악(乃救我於凶惡) 아믕(亞孟)”이라고 소리 내 기도했다. 또 ‘성모송’을 “야우마리아(亞物瑪利亞) 만피에라지아쟈(滿被額辣濟亞者) 주여이해언(主與爾偕焉) 여중이위찬미(女中爾爲讚美) 이태자여수(爾胎子耶) 병위찬미(倂爲讚美) 천주성모마리아(天主聖母瑪利亞) 위아등죄인(爲我等罪人) 금기천주(今祈天主) 급아등사후(及我等死候) 아믕(亞孟)”이라고 외었다.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신자들이 라틴말 뜻을 모른 채 미사 때 화답하였듯이 주요 기도문도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읊조린 것이다.
우리말로 기도문이 옮겨진 이후 비로소 조선 신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 네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며, 네 나라이 임하시며, 네 거룩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룸 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면하여 주심을, 우리가 우리에게 득죄한 자를 면하여 줌같이 하시고, 우리를 유감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또한 우리를 흉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성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 주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여인 중에 너 총복을 받으시며, 네 복중에 나신 예수 또한 총복을 받아 계시도소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이라며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면서 기도할 수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민족의 주체성뿐 아니라 민족 문화의 주체성을 뚜렷하게 지닌 사목자였다. 그는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민족과 사회의 발전에 유익하다면 동서양을 구분하지 말고 개방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교회가 올바른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하고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조선 사람들은 쉽사리 합리적인 순리를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길을 잘 파악합니다. 만일 한마음 한뜻으로 백성에게 같은 이론을 가르치고 계몽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계몽을 받아 이에 정통한 자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1857년 9월 15일 불무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한글 기도서와 교리서 편찬최양업 신부는 또 가톨릭 교리에 대한 학문적 탐구 없이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비난을 일삼는 조선 지식인들의 폐쇄성을 안타까워했다. 최 신부는 이런 맥락에서 우리 민족을 일깨워 계몽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올바로 가르치기 위해 한글 기도서와 교리서 편찬에 앞장섰다. 무엇보다 교우촌을 사목하면서 한글이 교리교육에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 최 신부는 신자들이 교리를 쉽게 배우고 이해하는 데 한글을 적극 활용했다. 그래서 최 신부는 1859년 이전부터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앵베르 주교가 옮긴 한글 기도서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새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사용됐다. 앞에 소개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최양업 신부가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글로 옮긴 우리말 기도문이다. 「천주성교공과」는 1862년에, 「성교요리문답」은 1864년에 목판본 초판이 간행됐다. 하지만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1861년 9월 30일 홍콩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침내 인쇄소를 갖추게 되었습니다.…벌써 교리서가 인쇄되었습니다”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성교요리문답」이 이때 벌써 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최양업 신부는 생전에 이 두 책을 볼 수 없었다.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 목판본에는 다블뤼 주교 역본으로 나오지만 사실상 두 책 모두 최양업 신부의 작품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다블뤼 주교는 1859년 9월 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연중 주요 기도서」를 번역하고 있는데, 그가 오랜 순방에서 돌아오는 올여름에 틀림없이 번역을 끝낼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연중 주요 기도서」가 「천주성교공과」라는 이름으로 간행됐다. 또 다블뤼 주교는 1861년 1월 24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위가 오기 전에 무엇보다 우리 기도서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소중한 총서가 완성되면 저는 찬미의 노래 테 데움을 부를 거예요. 게다가 그 서적들은 거의 전적으로 조선인 사제 토마스 신부의 작업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고작해야 8~9개월 그 작업에 매달렸을 뿐입니다”라고 알리고 있다.
페롱 신부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언어 장벽으로 어려움을 겪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대신 최양업 신부가 한글 기도서와 교리서 편찬 대부분을 맡아 했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를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벌써 이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이 일에 종사할 만큼 이 말을 잘 아는 다블뤼 주교는 그를 잃음으로써 그의 오른팔을 잃게 되었습니다.”(페롱 신부가 1861년 7월 26일 조선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천주가사 신자들에게 보급최양업 신부는 한글 기도서와 한글 교리서 번역 편찬 작업뿐 아니라 가톨릭 교리 내용을 우리 민족의 전통 가사체 운율에 실은 ‘천주가사’를 지어 신자들에게 보급했다. 최 신부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는 사향가(思鄕歌)ㆍ선종가(善終歌)ㆍ사심판가(私審判歌)ㆍ공심판가(公審判歌) 등 4편이 있다. ‘박해 시대 시편(詩篇)으로 평가받고 있는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그 어떤 권력과 인간관계도 하느님 공경에 앞설 수 없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지당하지만, 하느님을 저버리면서까지 효와 충을 유지할 수 없다. 진정한 효와 충은 하느님 안에서 드러난다. 하느님께 대한 효와 충의 실천은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을 이루는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실천이다.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순명과 배은망덕을 근거로 이뤄지므로 죄를 통회하고 보속의 삶을 살아야 한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테오필로스’에게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인 사도들의 행적, 그리고 교회 탄생의 이야기를 선포했듯이, 최양업 신부는 조선 후기 잡가나 단가, 민요에 많이 나오는 ‘어화 벗님네야’라며 신자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을 전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계시와 성경 내용, 교회 가르침과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 왕에 대해 박해자들에게 증언하는 「호교론」을 썼다면, 최양업 신부가 쓴 네 편의 천주가사는 한글로 남긴 한국 교회 호교론 작품이라 하겠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