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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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문 활짝 열고 어린이 병원과 교도소를 방문하다

[부온 프란조!] 19. 성 요한 23세 교황 ②(제261대, 1881. 11. 25 ~196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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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 사도궁 정원을 산책하는 요한 23세 교황과 개인비서 돈 로리스. 교황의 등 뒤로 성 베드로대성전 지붕 쿠폴라가 보인다. 당시 쿠폴라에는 누구도 올라가지 못했는데, 요한 23세 교황이 바티칸의 아름다움은 교황 개인만이 누리는 게 아니라며 모든 사람이 올라가 볼 수 있게 했다.




“엑스트라 옴네스!(Extra omnes)”

‘모두 바깥으로’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콘클라베 참석자 외에 모든 사람은 다 나가라”고 교황청 교황전례원장 몬시뇰이 시스티나 성당의 문을 닫으며 외치는 말이다. 1958년 10월 9일 비오 12세 교황이 서거하고, 콘클라베가 시작되었다. 4일간 11차례 투표에서 베네치아 총대주교인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가 1958년 10월 28일에 261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77세가 넘은 고령의 요한 23세, 론칼리를 혹자는 ‘지나가는 교황’ 또는 ‘징검다리 교황’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자신 또한 ‘임시적으로 지나가는’이라는 표현을 자신의 ‘영혼의 일지’(Il Giornale dell’Anima)에 썼다. 그러나 현재까지 요한 23세 교황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교황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도 믿지 못할 정도의 그 위대한 공의회 공표(1959년 1월 25일)와 시작(1962년 10월 11일)은 그의 4년 7개월 6일의 짧은 교황직에서 실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는 교회의 얼굴을 사목적 복음선포자로, 선교자로, 교회 일치(Ecumenical)의 통합자로 바꾸는 데 용기를 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 기적은 충분히 우리가 그를 성인으로 호칭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2014년 4월 27일은 그가 성인 반열에 오른 날이다. 다음 호에는 공의회의 진행 과정,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쓸 예정이다.



요한 23세가 ‘파파 부오노’라 불리는 비밀

그가 왜 ‘파파 부오노(Papa Buono, ‘착한 교황’)라고 불리게 됐는지에 대한 비밀이 있다면 이것이다. 항상 미소 짓는 모습에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어떠한 언어의 기교도 없이 만나는 모든 사람의 좋은 점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봄과 연결하여 주고 싶다는 그의 착함 마음씨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 시기는 가공할 전쟁(제2차 세계대전)과 전대미문의 학살(나치의 유다인 학살)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후 상처들로 피폐해진 데다, 또다시 강대국들의 반목으로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는 레오 13세의 노동헌장 「새로운 사태」 반포 70주년이 되는 1961년 5월 15일에 회칙 「어머니요스승」을 공표함으로써 교회가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관한 문제를 그리스도교 규범에 따라 해결되어야 함을 다시 전하고자 하였다. 또 20여 년간 그는 교황 대사로서 항상 정직한 말과 행동으로 불가리아의 소피아(1925년), 터키의 이스탄불(1934년), 프랑스의 파리(1944년)에서 재직하며 외교는 물론 정교회, 유다인들과 타 종교인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미 거기서부터 에큐메니즘(그리스어 oikoumne에서 기원한 교회 일치 운동으로, 함께하다, 같이 나누다라는 뜻)의 신호탄이 오른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하느님은 론칼리를 통해 교회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당신 자비의 비를 내리게 할 계획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파파 부오노의 실제 음성을 오디오 녹음 자료를 통해 들어보면 소년처럼 참으로 귀여운 목소리이다. “오~ 내가 할아버지처럼 느껴질 땐 아침마다 세수할 때 내 얼굴 주름이 보일 때뿐입니다. 하하. 난 아직 어린아이 같은 마음입니다”라고 밝게 웃으며 고백했다고 한다. 80세의 고령자임에도! 교황 선출 첫해, 성탄 전 15일쯤, “돈 로리스(1915~2016, 교황의 개인비서), 나의 어머니께서는 성탄이 가까워지면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셨어요. 아, 나도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는데…. 우리 나가면 안 될까요?”라고 의견을 구하자 “교황 성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잠시 전임 교황님께서 폭파된 로마시에 나가셔서 위로하셨던 그때만 제외하고는 1870년 이후 바티칸 밖으로는 어느 교황님도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하고 돈 로리스는 답변했다. 그의 말을 들은 교황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돈 로리스!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간단합니다”라고 말했다. 의아해 하는 돈 로리스에게 정색을 하며 요한 23세는 “바티칸의 문을 열면 됩니다!” 하고 잘라 말했다.



“여러분이 올 수 없으니 제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1958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교황은 산타 할아버지가 되어 바티칸 근처 ‘아기 예수 어린이 병원’을 방문하여 어린 환자들에게 장난감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고 그들의 부모들을 위로했다. 이어 1958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에는 테베레 강가에 위치한 ‘레지나 첼리 교도소’를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이 방문하였다. “교황이 돌아다니기는 쉽지가 않아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제게 올 수 없으니 제가 왔습니다. 지금 제가 온 여기, 여러분이 있는 이곳도 하느님의 집입니다. 아, 여러분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고요. 제 마음을 여러분 가까이에 두고 싶고, 여러분의 마음이 저와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잊힐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제게 사랑하는 자식들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 아내, 아이들, 누이…, 그들은 여러분의 행복이기도 하지만, 만날 수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들과도 함께 제 마음을 나눕니다. 오늘 저녁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세요. 꼭 전해 주세요. 파파가 여기에 왔었고, 특별한 축복을 보내고 기도한다고요. 여러분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감옥 안 수감자들의 눈물과 감동의 박수소리, 그리고 “비바 파파!”(viva Papa!, 교황님 만세)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렸는지, 교황의 방문이 엉뚱하다고 생각하며 부정적 태도를 보이던 사람들도 놀라워했다고 전해진다. 바티칸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돈 로리스, 바로 이것이 교황의 기쁨입니다”라고 말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1962년 우리나라에도 수해 복구금 보내

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시편을 읊고, 미사 전, 소박한 침대 위에 걸어둔 부모님 사진과 고향 소토 일 몬테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돈 로리스와 한 약속 가운데, 둘 중 먼저 하느님의 집으로 가게 되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누구보다 먼저 알려주기로 했다. 공의회 공표 후 엑스레이 검사 결과, 교황이 그의 형제들과 같은 위암 판정을 받았다는 결과를 안타깝게도 돈 로리스가 눈물과 함께 교황에게 알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교황은 울고 있는 그를 위로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에 흔들림 없이 걸어나갔다. 결코, 교회가 뒷걸음질치지 않게, 교회 역사가 공의회를 통하여 쇄신의 길을 걸어나가기를 기도하면서!

그의 꾸밈없고 진솔한 말을 들으려고 늘 성 베드로 대성전의 광장에는 뛰어오는 신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달려오던 사람들처럼 나도 무조건 달려가고 싶다. 참,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9월, 수해로 어려움에 부닥친 우리나라 순천시에 미화 1만 달러의 수해 복구금을 보냈다. 파파 부오노는 이역만리 먼 나라인 우리의 어려움에도 함께한 것이다.

그는 베르가모 신학교에 수학하다가 로마의 대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마친 다음, 1904년 8월 10일 사제품을 받았는데, 그 시기에 론칼리가 즐겨 먹었던 로마의 카르보나라가 오늘의 레시피이다.



레시피 : 카르보나라(Carbonara)

▲준비물 : 스파게티 100g(1인분), 달걀노른자 2개, 도톰한 베이컨 60g,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또는 파르마산 치즈) 1숟가락, 후추.

→팬에 잘게 썬 베이컨을 약한 불에서 바싹할 때까지 구워 놓는다. 베이컨에서 기름이 쪽 빠질 때까지.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알덴테(Al dente, 치아로 씹었을 때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로 설익었다는 뜻) 면을 삶는다.

→볼(Bowl)에 달걀노른자, 갈아 놓은 치즈 가루, 약간의 후추를 넣고, 잘 섞는다.

→알덴테로 삶아진 면을 베이컨이 들어 있는 팬에 넣고 좀 센 불로 볶는다. 즉시 불을 끄고, 볼에 있는 노른자를 면 위에 붓고 동그랗게 계속 젓는다. 적당량의 면수를 넣어가며 크림화한다. 부드러운 면으로 크림화가 되었으면, 접시에 담고, 그 위에 살짝 후추를 뿌린다. 이것이 정통 로마식 ‘카르보나라’다.



▲모니카의 팁 : 카르보나라는 석탄이라는 뜻이다. 로마에서 100㎞가량 달리면 아펜니노 산맥의 높은 산들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도시락으로 싸갔던 파스타의 이름을 그야말로 석탄, 카르보나라라고 지었다. 사실 베이컨을 쓰는 게 아니라 돼지 볼살인 염장 관찰레(Guanciale)를 써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기가 어렵다. 이탈리아인들도 염장 판체타(Pancetta, 돼지 뱃살, 삼겹살)를 주로 쓴다. 마늘을 쓰지 않으며, 면수를 크림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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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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