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광주대교구장 옥현진 대주교 삶과 신앙
▲ 옥현진 대주교가 2015년 4월 이주민과 함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후 이주민들의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
‘옥 배려’. 신임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된 옥현진 대주교가 신학생 시절 얻은 별명이다. 다정다감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모든 사람을 잘 배려해 붙여졌다. 옥 대주교를 오랫동안 봐온 사제수품 동기 김종대(광주대교구 관리국장) 신부가 웃으며 전한 이야기다. 김 신부는 “옥 대주교는 배려심과 정이 많은 사제”라며 “11년 동안 보좌 주교로서 김희중 대주교님을 잘 보필했으니, 그 경험으로 사제단과 함께 좋은 공동체를 이룰 것”이라고 응원했다.
이처럼 옥 대주교를 잘 아는 가족과 지인은 하나같이 “마음 따뜻하고 착한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옥 대주교의 작은 아버지인 옥정호(바오로, 79, 광주 치평동본당)씨는 “한 지붕에 살며 어린 시절부터 봐온 옥 대주교는 ‘천사 중의 천사’”라며 “누구하고도 절대 다투는 일 없이 화목하게 잘 지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 선한 인품으로 ‘말씀의 순교자’가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 어린 시절 옥현진(왼쪽) 대주교가 사촌 형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가족 제공 |
복사 활동하며 사제 성소 키워
옥 대주교는 1968년 전남 무안에서 옥군호(율리오, 90, 광주 신동본당)ㆍ모매실(루치아, 87) 부부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옥 대주교는 일찍이 의로움과 신앙을 배웠다. 태어난 해에 무안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옥 대주교는 어릴 적 가족과 함께 광주비행장 근처로 이사 왔다. 그리고 가까운 신동성당에서 꾸준히 복사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본당 주임 신부의 삶을 보며 사제 성소를 키워 나갔다. 아직도 옥 대주교를 부를 때 ‘막둥이’라는 말이 나오는 어머니 모씨는 “처음 신부님이 되겠다고 말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가난한 시절이라 집에 냉장고도 없는데, 어느 날 신부님이 ‘복사를 잘해서 착하다’고 막둥이를 사제관으로 데리고 가서 참외를 깎아줬나 봐요. 그날 집에 와서 저한테 ‘신부님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참외도 깎아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아이가 별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걸 잊지 않고 커서 신학교에 간다더라고요. 예쁘게 키운 막둥이인데 고생만 할 것 같아 걱정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반대했는데 막둥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육 남매 중 막내임에도 옥 대주교는 어릴 적부터 키가 크고 어른스러웠다. 남들보다 이른 6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첫날부터 급장(반장)이 되고 싶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고 한다. 성격도 차분하고 공정해 싸움이 일어나면 늘 가운데서 중재하곤 했다. 공부 욕심도 많아 늘 앞자리에 앉고, 개근상을 비롯해 여러 상을 받아와 부모를 기쁘게 했다. “옥 대주교가 말하는 것은 틀림이 없어요. 그래서 늘 의견을 물어보죠. 제 살림살이가 얼마 되진 않지만, 삶이 끝날 무렵 옥 대주교에게 다 일임하려고 합니다. 공정하고 정당하게 잘 나눌 거라고 믿어요.”
▲ 옥현진(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 대주교가 부모님과 형(맨 오른쪽) 가족들과 함께한 사진. 가족 제공 |
지덕 갖춘 사제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옥 대주교는 곧장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94년 졸업해 사제품을 받았다. 신동본당 출신 첫 사제였다. 이후 옥 대주교는 농성동ㆍ북동본당 보좌를 지낸 뒤 1996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2004년까지 교회사를 공부하며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8대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와 처음 만난 것도 이때였다. 최 대주교는 ‘참 성실해 보이고, 지덕을 갖춘 젊은 사제’라고 옥 대주교의 첫인상을 기억했다. 최 대주교는 1999년 광주대교구 부교구장으로 부임하자마자 2000년 대희년 준비를 위해 로마를 찾았다. 아직 로마 한인신학원도 개원하기 전, 이탈리아어도 모른 채 난생처음 로마에 온 그에게 큰 힘이 돼준 이가 바로 옥 대주교였다. 최 대주교는 “숙소를 구하기도 어려워 옥 대주교 기숙사에 묵었다”며 “지리도 말도 모르는 저를 친절하게 잘 안내해줘 정말 고마웠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또한, 옥 대주교는 ‘학구파’였다. 최 대주교는 “제가 교구장일 때, 옥 대주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일본어 문헌을 읽어야 한다고 해서 6개월간 일본 어학연수를 허락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참 준비된 교구장이었다”고 평했다.
2004년 로마에서 귀국한 옥 대주교는 운남동본당 주임과 광주대교구 교회사연구소장을 지냈다. 2006년부턴 광주가톨릭대 교수로 사제 양성에 힘을 쏟았다. 특히 1학년생을 총괄하는 제1영성관장을 자원해 4년간 맡으며 신학생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돼줬다. 신학생들은 좀처럼 말하기 힘든 가정사까지도 옥 대주교에게 편안히 털어놓았다. 물론 신학생들에게 가장 무섭고 잔소리를 많이 하는 이도 옥 대주교였다.
서품 5년 차인 장현욱(광주 청소년사목국 부국장) 신부는 “신학교 1학년 때 담당 신부가 옥 대주교였다”며 “제가 신부가 될 수 있는 초석을 잘 다져준 분”이라고 회상했다. 장 신부는 “옥 대주교님이 ‘너희가, 신부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정의’라고 분명히 말씀해주신 게 기억에 남는다”며 “보좌 주교이실 때도 보좌 신부를 많이 돌봐주셨다”고 덧붙였다.
주님 부르심에 순명, ‘가장 젊은 주교’
옥 대주교는 2011년 5월 12일 광주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됐고, 그 해 7월 6일 주교품을 받았다. 사랑하는 ‘호랑이 교수 신부님’이 떠난다는 아쉬움에 눈시울을 붉히는 신학생들도 있었다. 옥 대주교의 문장은 두 팔 벌려 세상 모든 사람을 끌어안는 주님을 형상화했다. ‘내 안에 머물러라’(Manete in me, 요한 15,4)라는 사목표어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서 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당시 옥 대주교는 만 43세로, 가장 젊은 주교였다. 그는 가톨릭평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사제가 이렇게 무겁고 중요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긴 묵상 끝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예’라고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저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며 “항상 듣는 자세로 주위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며 주교 직무를 하나하나 배워 나가겠다”고 전했다.
옥 대주교는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주교회의 사회홍보위원회 위원장ㆍ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옥 대주교는 언제나 약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곁에 서 왔다. 해군 기지로 갈등을 겪는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과 세월호 참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 옆에도 옥 대주교가 있었다. 특히, 광주대교구 세월호 1주기 준비위원장을 맡아 2015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유가족과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 2017년에는 6ㆍ25전쟁 때 전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전기수(그레고리오)ㆍ고광규(베드로) 두 신학생의 묘를 담양 천주교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고, 현양 미사를 봉헌했다.
보좌주교로 김희중 대주교를 보필하며 바쁘게 달려온 11년. ‘평소 취미생활을 즐길 시간은 있었냐’는 질문에 옥 대주교는 “기타는 많이 못 쳤지만, 그래도 탁구는 계속 하고 있다”고 웃으며 답했다. 옥 대주교의 탁구 실력이 국가대표 선수와 경기가 가능할 정도로 수준급이라는 전설(?)은 유명하다. 볼링도 좋아해 로마로 유학을 떠날 때 개인 볼링공을 챙겨 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