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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대건 원장은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린다. 그는 평생 한센인들 1만 5000여 명을 치료해줬고, 밤에는 치과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직접 보철을 제작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
2013년 5월 첫 주 화창한 봄날 주일 아침에 김득권 신부님께서 전화하셨다.
“허 신부, 내일 한센인들을 위해 33년 동안 쉬지 않고 치과 봉사를 한 강대건 원장님이 감사패를 받게 되었어. 이제 마지막이니 교회 언론이 와서 취재했으면 해서.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잖아.”
“예전에 저희 신학생들 치과 치료해주시던 강대건 원장님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래, 맞아, 그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님.”
“언제부터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셨어요?”
“벌써 33년이 지났어….”
김 신부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나니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일반 언론과 외국 언론에 알려야 하는 굿뉴스임을 직감했다. 실제로 다음날부터 일반 언론의 기자들도 강 원장님의 봉사 활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취재하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이탈리아나 프랑스, 미국의 신문들도 큰 관심을 보였고 나는 대략 다섯 군데 외국 언론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그만큼 세계 교회 내에서도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얼마 후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께서 당시 교구장 수석비서였던 내게 강 원장님에 대한 교황님의 훈장추서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부터 자료를 준비해 주한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훈장추서 요청서류를 보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구장님께 예외적으로 3개월 만에 아주 빠른 허락 서신의 답신을 보내주셨다.
Q. 지금도 교황님 훈장을 받으셨을 때가 기억나실 텐데 감회는 어떠세요
A. 솔직히 저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저는 언론에 알려지고 교회가 특별히 추천해주셔서 큰 상을 받게 된 거죠. 내가 도울 사람이 그때 많았을 뿐이고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없어요.
Q. 너무 겸손한 생각이세요. 2012년에 한센인들 봉사를 그만두신 것은 선생님의 건강 때문이셨나요
A. 당시에 제가 팔순이 넘어 물론 기력도 많이 떨어졌겠죠. 제가 초창기 진료 때는 40여만 명이던 한센인 수가 1만 명 남짓으로 줄어들면서 진료할 대상도 많이 줄었어요. 그리고 한센인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졌고요. 2012년 전북 고창에서 마지막 진료를 마치게 된 것도 그 지역 한센인 환자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에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그러면서 마지막 진료 일기를 꺼내 보여주셨다. 대학노트에 원장님이 직접 손으로 꾹꾹 눌러 쓰신 글이 눈에 들어온다.)
“제가 진료를 맡은 전라북도 호암마을 정착촌은 전북 제일 서쪽에 위치한 외지로 40호 정도입니다. 요즘은 한센 환자 등급이 있어 연금이 매달 25만 원에서 40만 원 정도 지급됩니다. 칠십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옛날 지원을 못 받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부자가 됐다며 이젠 혼자 사는 데 괜찮다며 웃으십니다. 동네 한 부부는 농사지으며 못사는 아들에게 도움까지 주고 산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제 환자가 없어서 진료소 문을 닫습니다. 초기엔 한센환자들이 몰려와 줄까지 길게 선 상황이라 점심도 거르면서 진료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30여 년 동안 국가 경제가 많이 발전하고 사회보장제도 또한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주님! 한센환자 수도 자연 감소로 수가 급격히 줄어 오늘 주일 치과 진료소를 정착촌에서 철수합니다. 이날을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합니다.”
Q. 교회 홍보를 오래 맡고 있었던 저도 최근에 강 원장님이 한센인들을 오랫동안 치료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활동을 외부에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었나요
A. 제 성격도 소극적이고 한센인 봉사는 첫 번부터 주변에 일절 알리지 않았어요. 가족에게도 비밀로 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썼어요. 그 긴 세월을 김득권 신부님은 저의 봉사활동을 자문해주시고 진료 봉사 재정보고서 감사도 해주셨어요. 사실 김 신부님이 몇 번 신문 인터뷰를 권하기도 하셨어요. 다른 건 다 신부님 말씀을 따랐는데 ‘선행은 인간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고, 제가 하는 일이 알려지는 것을 무척 꺼려서 인터뷰는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도 들어요. 조금 제가 완벽주의라 자신을 채찍질했던 것 같기도 했고요. 공동체에서 주는 감사패나 외부의 큰 상들도 항상 거절했어요. 아무래도 알려지면 제가 하는 일에 지장을 줄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사실 주일 진료를 하다 보면 시간에 쫓겨 점심을 거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인터뷰할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환자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웃음)
Q. 주변 분들은 선생님이 조금만 짬이 나도 눈을 감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는데 무슨 기도를 하셨나요
A. 지금처럼 빠른 KTX가 없던 때라 새마을호 기차로 당일 왕복 거리치곤 서울과 대구는 짧은 거리는 아니었죠. 진료 외에 남은 시간엔 늘 기도했던 것 같아요. 가장 많이 한 기도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였어요. 연옥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기도가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겠죠.
Q. 강 원장님이 늘 상이나 기념패를 거절했는데 2013년에는 전국 가톨릭 한센인들의 모임에서 주는 감사패는 받으시겠다고 하셨어요. 한센인들은 꼭 원장님에게 무엇이라도 하고 싶으셨을 거예요
A. 저는 사실 봉사를 다 마치고 한국가톨릭자조회의 2013년 3월 연례 총회 자리에 참석하고 감사패를 받으려고 했는데, 마침 병이 들어 참석을 못 했지요. 그 이후 감사의 뜻을 직접 전하기 위해 논산, 대구 등지에서 서울 제 병원으로 찾아오신다고 해서 감사패는 받게 되었어요. 지도신부이신 김득권 신부님도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저를 설득하셨죠. 전국의 한센인들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감사패 전달식에는 가톨릭자조회 회장 및 대표자들과 엠마 프라이징거(Emma Freisinger) 여사와 김 신부님이 참석하셨죠.
Q. 그 감사패 전달식이 강 원장님이 하셨던 봉사의 삶을 비로소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었죠. 그런데 원장님은 늘 가족에게, 특히 아내분에게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셨어요. 그런데 만약 혹시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봉사하시겠어요
A. 봉사는 제게 기쁨을 주지만 그만큼의 인내도 필요한 것 같아요. 노고의 땀과 수고와 고민이 늘 교차하죠. 그래도 자기와의 투쟁 속에서 봉사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 아름다움이 되는 것 같아요. 봉사의 기쁨을 맛보면 남한테 안 주고 싶어요.(웃음)
강 원장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잊히지 않는 대목이 있다. 어느 날 원장님이 한 병원에 갔는데, 그 병원에 찾아온 나환자를 보고 병원은 돈을 집어 던지고 발로 차면서 내쫓았다고 한다. “문둥이 자식, 어디 병원 망하게 할 일 있어?”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그때 땅에 쓰러져 주눅이 든 환자의 눈빛을 원장님은 보았다고 한다. “아마 저는 죽을 때까지 또렷하게 기억할 거예요. 저는 그 환자의 눈빛이 성모님과 예수님이라 믿었어요. 당신의 눈빛을 저에게 보여주시고 주님의 봉사자로 부르셨다고 믿어요.”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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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엽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