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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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땅’ 나가사키 현에서 느낀 일본 교회의 숨결

일본 나가사키 세계 문화유산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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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잠복 키리시탄 관련 유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성된 세계 문화유산 순례길 지도.

▲ 히라도의 니시겐카 순교복자 묘소에서 히라도관광협회 안내자인 타니가와 노부유키씨가 순교복자 일가의 순교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길에 섰다. 그 길을 걸었다. 일본 규슈 나가사키(長崎) 현의 길이다. 나가사키 하면, 히로시마(島)와 함께 세계 최초의 원폭 투하를 떠올리게 되지만, 그에 앞서 나가사키는 ‘순교자들의 땅’이다. 일본 천주교회의 첫 성인 26위가 순교한 니시자카(西坂), ‘동방의 사도’이자 ‘선교사업의 수호자’로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신부가 선교했던 히라도(平), 땅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와 열기, 유황 냄새가 지옥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운젠지고쿠(雲仙地獄), 시마바라(島原)ㆍ아마쿠사(天草)의 난 때 반군 거점이었던 하라성(原城)도 나가사키 현에 있다. 이뿐 아니라 나가사키 현 곳곳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순교지가 줄을 잇는다. 2018년 6월, ‘나가시카와 아마쿠사 지방의 카쿠레 키리시탄(伏キリシタン, 숨은 그리스도인) 관련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495호)으로 등재된 것도 대항해시대 선교 거점이자 순교지였던 역사가 작용했다. 그 선교 흔적과 순교지, 신앙 유산을 잇는 길은 일본 교회만의 독특한 순교 숨결을 체험할 수 있는 순례 길이다. 그래서 나가사키 현과 아마쿠사 제도는 최근 12곳의 세계 문화유산과 기타 신앙유산들, 순교성지를 돌아보는 ‘세계 문화유산 순례길’을 조성했다. 이에 지난 11월 말 나가사키 현에서 마련한 팸투어(Fam Tour)를 통해 이들 순례 길을 돌아봤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불안과 두려움으로, 절망과 눈물로 걷는 길. 때론 흔들리고, 때론 갈등하고, 때론 번뇌하며, 드물게는 기쁨과 희망을 안고 걷는 길. 높고 낮고, 깊고 얕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길은 삶과 같다. 시시때때로 가시밭길을, 벼랑 끝을 마주하게 되고, 걸핏하면 도돌이표다. 그럴 때면 출발지로, 원점으로 되돌아와 떠나야 한다. 하지만 ‘여는’ 도돌이표가 있듯이, ‘닫는’ 도돌이표도 있으니, 언젠가는 모든 게 마무리돼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누구에게나 올 터다.

수백, 수십 년 전 순교자들도 그러했을까? 순례는, 어쩌면 우리에 앞서 천국으로 돌아가 하느님 곁에서 천상복락을 누릴 순교자들과 그 삶에 대하여 나누는 말 없는 대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잔혹했던 처형의 현장, 곧 순교성지는 죽음의, 처형의 공포를 느끼는 곳이 아니다. 죽음보다는 삶을, 죽음의 양상보다는 순교하기까지 살아생전 순교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곳, 곧 깊은 대화의 장일 수도 있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카쿠레 키리시탄 관련 유적’을 잇는 순례 길은 총연장 468㎞다. 나가사키 현 구간이 439.7㎞, 구마모토 현 아마쿠사 섬 구간이 28.3㎞로, 나가사키 현 히라도 시에서 출발해 나가사키 시 오우라(大浦)천주당에 이르는 코스다. 468㎞를 총 35개 순례 구간으로 나눠 △숨은 성지를 돌아보는 길(1∼3순례 길) △신천지로의 개척, 이주의 길(4∼12순례 길) △희망을 주었던 예언의 길(13∼16순례 길) △키리시탄 다이묘(大名, 영주)와 소년사절단의 길(17∼27순례 길) △그리스도교 번영과 시마바라ㆍ아마쿠사의 난의 길(28∼35순례 길) 등 모두 5개의 주제(Theme) 코스로 구성했다. 짧게는 5㎞, 길게는 20㎞ 구간으로 이뤄져 있어, 짧은 코스는 서너 구간을 한꺼번에, 긴 코스는 한 구간만 걸어도 숨이 찬다. 아직은 순례 길을 지정한 지가 얼마 안 돼 인도가 구분된 시내 길은 걷기가 좋지만, 국도나 지방도를 이용해야 하는 순례는 인도가 없어 아쉽다.

일본 가톨릭에만 존재하는 ‘카쿠레 키리시탄’ 얘기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 박해기가 100년이 좀 넘었다면, 일본은 260년이 넘는다. 금교령이 내려지는 1614년부터 1873년까지다. 그 이전에도 숱한 박해가 있었기에 박해기간은 300년에 가깝다. 그 긴 기간 동안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고토 열도(五島列島)로, 나가사키의 벽ㆍ오지로 숨어들었고, 박해와 순교는 계속됐다. 그럼에도 성모상을 불교 관세음보살상처럼 변형시켜 가며 은밀하게 신앙을 유지하고 대대로 전했다. 그 박해시기 역사 속에서 토착 가톨릭 신앙인들을 한자로 카쿠레 키리시탄(れキリシタン)이라고 불렀고, 1873년 금교령 해제 이후에도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않은 신앙인들을 가타카나로 표기하되 발음은 같은 ‘카쿠레 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 또는 ‘하나레 키리시탄’(離れキリシタン, 떠난 그리스도인)이라고 구별해 불렀다. 하나레 키리시탄은 1980년대까지 유지되다가 사라진 것으로 전해졌지만, 고토와 이키츠키 섬에서 최근까지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복음이 전해진 관문’ 히라도

1주제 길 순례는 나가사키 현 서북단 히라도 번 교류(交流) 광장에서 시작된다. 히라도 번은 명나라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포르투갈 상인들과 일본 사이에 교역이 오가던 무역 중심지. 당연히 일본의 가톨릭 선교는 히라도에서 시작됐다. 1549년 8월 규슈 최남단 사쓰마(薩摩) 국과 오스미(大隅) 국(오늘의 가고시마 현과 아마미 제도)을 통해 일본에 들어온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히라도를 세 차례나 방문, 히라도 번 25대 당주 마츠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의 허락을 받아 선교를 시작했다. 포르투갈 무역에 대한 기대 때문에 많은 성당이 세워지고, 서양식 의술이 들어왔다. 마츠우라의 가신 고테다(籠手田)와 동생 이치부(一部)도 1553년에 개종했고, 그 둘의 영지였던 이키츠키 섬과 타쿠(度) 섬, 히라도 서해안에 살던 주민들도 모두 개종했다. 그러나 ‘일본 복음화의 분기점’이 된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히라도 번의 26대 당주인 마츠우라 시게노부(松浦信)가 동군 편에 서서 승리하면서 히라도에서의 박해가 시작된다. 고테다와 이치부는 영민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피했지만 26성인 중 한 사람인 성 토마스 니시리쿠자에몬(西六左衛門) 신부의 아버지인 니시겐카(西玄可, 가스파르) 가족 등 이키츠키에 남은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다.

복음이 들어온 ‘관문’ 역할을 했던 항구에서 바라본 언덕배기엔 히라도 성당, 곧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이 세워져 있다. 히라도 성 맞은편이다. 금교령이 풀리고 58년이 지나 1931년에 건립된 성당은 묘한 비대칭 성당이다. 중앙에는 큰 첨탑을, 왼쪽에는 작은 탑을 배치해 수직성을 강조했고, 벽과 기둥에 전통 회반죽 기법으로 얼룩얼룩한 마블 무늬를 입힌 것이 특징이다. 교류광장에서 ‘카쿠레 키리시탄의 성지’ 이키츠키 섬(生月島)까지, 이키츠키에서 네시코(根獅子) 순교지까지, 네시코에서 츠요시(津吉)까지가 ‘숨은 성지를 돌아보는 길’을 주제로 한 히라도 시 코스다.

길을 안내하던 타나기와 노부유키(谷川信行, 61)씨는 “히라도의 복음화율은 14 정도 되는 데, 이런 신자 비율은 일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신자들이 이렇게 많고 신앙이 단단한 것은 260년이 넘는 박해에도 꿋꿋이 신앙을 지켰던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고토 열도에서 히라도로 돌아와 성당을 세우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히라도 이키츠키 섬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 고토 열도에서 이주해온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대부분 가톨릭교회로 돌아왔지만, 원래 이키츠키에 살았던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가톨릭에 불교나 신도, 민간신앙이 뒤섞인 형태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카쿠레 키리시탄의 땅’ 고토 열도

박해를 피해 가톨릭 신자들은 ‘고토 열도로의 이주’를 선택한다. 이 루트를 따라 걷는 길이 2주제 길인 ‘신천지로의 개척, 이주의 길’(4∼12순례 길)이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히라도에서 사세보(佐世保) 시를 거쳐 바다로 60㎞가량 떨어진 고토 열도로 들어가야 한다. 고토 열도 오지카초(小値賀町)의 노자키(野崎) 섬이 순례의 기점으로, 고토 열도 중에서도 북부에 있는 ‘신카미고토초’(新上五島町)의 4코스, 60㎞를 걷고, 끝으로 고토시 나루(奈留) 섬과 히사카(久賀) 섬, 후쿠에(福江) 섬의 도자키(堂崎) 천주당과 오쿠라항까지 걷는 길이 이 고토 순례의 종착지다.

고토 열도는 나가사키 신앙의 못자리다. 나가사키 대교구 전역에 있는 138개 성당 중 40에 가까운 50개 성당이 고토에 있기 때문이다. 시모고토(下五島)에 20개, 가미고토(上五島)에 30개가 세워져 있는데, 이들 성당은 모두 박해를 견딘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금교령이 해제되면서 세운 성당들이다. 이중 가미고토 노자키 섬에 있는 큐노쿠비(野首) 천주당은 본격적인 벽돌건축물로, 엄혹했던 박해를 견뎌내고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신자들이 세웠다. 역시 가미고토에 있는 신카미고토초의 국가 중요문화재 ‘가시라가(頭ヶ)섬 천주당’은 1919년에 신자들이 손수 자른 사암을 쌓아 올려 만든 보기 드문 석조 성당으로, 이 성당을 만든 40가구 신자들은 낮에는 성당을 짓고 밤에는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로 성당을 세웠다. 십자가 모양의 7개 유인도와 크고 작은 60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신카미고토쵸는 규슈 서해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비경으로도 유명하다.

시모고토로 내려오면, 후쿠에 섬의 도자키 성당이 나온다. 금교령 해제 이후 1880년에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마르만(Joseph Marmand) 신부가 바다에 인접한 도자키에 세운 고토의 첫 성당이다. 고토 가톨릭의 어머니 본당인 셈이다.



개항과 번영, 순교와 부활을 체험하는 여정

3주제 길인 ‘희망을 주었던 예언의 길’은 나가사키 시를 걷는 총 4코스 41.5㎞ 여정이다. 하루에 20㎞씩 이틀이면, 다 걷는 가장 짧은 코스이다. 시내이니,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나가사키를 얘기하면서, 일본 최초의 가톨릭 영주인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바르톨로메오)를 빼놓을 수 없다. 히라도 번 등 주변 영주들과의 다툼 속에서 1561년 요코세우라(浦)를 시작으로 후쿠다우라(福田浦)로, 다시 나가사키로 남만 무역항을 이전하면서 무역을 일으켰고, 1570년 개항한 나가사키와 모기(茂木) 지역을 ‘교회령’(敎會領)으로 예수회에 맡겨 ‘작은 로마’로 불리게끔 했던 인물이다. 당시 나가사키에 살았던 2만 5000여 명의 주민은 대부분 천주교도였고, 지금도 나가사키의 복음화율은 4.5에 이른다. 교회령이던 나가사키의 예수회 본부와 주교관, 신학교(collegio), 성 바오로 성당(1571년), 성모승천성당(1601년)이 들어섰다가 1614년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나가사키 현 청사로 쓰다가 지금은 재개발을 앞둔 구청사 부지,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원폭의 참상을 볼 수 있는 평화공원, 니시자카의 26성인 기념관과 필리피성당, 나가사키 아구리(あぐり) 언덕과 미에(三重), 고노우라초(ノ浦町) 등 번영했던 신앙의 숨결, 순교, 박해를 피해 잠복했던 역사,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기까지의 일본 가톨릭의 발자취를 모두 체험하는 길이다.

2019년 9월 4대 일본26성인기념관장 김형욱(예수회) 신부는 “니시자카 순교지는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만 600명,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를 포함하면 3000여 명에 이르는 일본의 대표적 순교성지”라며 소개하고,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으로 그동안 거의 순례자가 오지 못했는데, 요즘 들어 다시 순례자들이 늘어 기대가 높다”고 밝혔다.



일본의 가톨릭 영주들과 로마를 찾은 소년사절단

4주제 길인 ‘키리시탄 다이묘(영주)와 소년사절단의 길’은 영광의 길이자 순교의 길이다. 나가사키 시와 사이카이(西海)시, 사세보 시, 가와타나초(川田中町), 하사미초(波佐見町), 히가시코노기초(東彼杵町), 오무라(大村) 시, 이사하야(諫早)시, 운젠 시 등 9개 시정(市町)을 거치는 11개 코스에 150㎞나 된다. 5개 주제 코스 중 가장 길고, 가장 서사가 많은 길이다.

특히 이 길을 걸으며 ‘덴쇼(天正) 소년사절단’을 빼놓을 수 없다. 1582년 오무라 스미타다와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돈 프란치스코),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돈 프로타시오) 등 가톨릭 영주들이 예수회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신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로마에 파견했던 소년들로, 치치와(千千石) 미겔, 이토(伊藤) 만쇼, 하라(原) 마르티노, 나카우라(中浦) 줄리안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를 기획한 발리냐노 신부는 인도 고야까지만 수행했고, 이후로 로마까지는 디오고 데 메스키타(Diogo de Mesquita) 신부가 수행했다. 이들은 로마에 가서 교황 그레고리오13세를 알현하고, 유럽의 구텐베르크 인쇄기와 서양악기 등을 가지고 1590년에 귀국한다. 이 사절단에 의해 유럽인들에게 일본이 알려지게 됐으며, 일본 최초로 유럽에 건너갔다가 귀국한 일본인들은 일본 사회를 변화시켰다. 귀국 뒤 이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초청을 받아 부와 명예,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았으나 대부분 거절했고, 셋은 예수회원이 돼 선교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단 한 사람 치치와 미겔만이 신앙을 버리고 배교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덴쇼 유럽 파견 사절단의 고향을 차례로 찾게 되는데, 서해안 니시소노기(西彼杵) 반도에서 시마바라(島原)반도까지 ‘역사의 바람을 맞으며’ 걷는 여정이 꽤 아름답다.



260년 만의 만남, 보편신앙은 다시 이어지다

맨 마지막 5주제 길은 ‘그리스도교 번영과 시마바라ㆍ아마쿠사 난의 길’. 운젠 시를 출발, 미나미시마바라(南島原) 시, 아마쿠사 시, 료호쿠마치(北町)를 거쳐 종착점인 나가사키 시 오우라천주당으로 돌아오는 8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운젠시 치지와(千石)전망대에서 오바마온천, 운젠지코쿠 순교지로 이어지는 코스로 5주제 순례는 막을 올린다. 특히 유황 분화구에 신자들을 넣었다가 건졌다를 반복하며 배교를 강요했던 ‘운젠지코쿠’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나가사키와 시마바라의 부교(ぶぎょう, 奉行)에 의해 고안된 이 형벌을 ‘지고쿠 세메‘(地獄責)라고 불렀는데, 1627년부터 1631년까지 5년간이나 계속됐다. 1627년 2월, 지고쿠 세메를 당하며 죽어가면서도 “성체는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계속했던 무사 바오로 우치보리(內堀)의 영웅적 순교사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시마바라의 순례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시마바라 성 역시 가톨릭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영주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의 압제로 7년간 이 성을 짓느라 고통받던 가톨릭 농민 신자들이 일으켰던 반란이기 때문이다. 1637년 아마쿠사 시로우(天草四郞, 예로니모 혹은 프란치스코)를 지도자로 삼아 아리마 가문의 폐성인 하라성에서 일어난 민란에는 아리마의 전 주민 4만여 명이 참전했지만, 3개월 동안 보급이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 막부 정예군 12만 명의 총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막부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시마바라의 영주를 참수하고 아마쿠사 영주의 영지를 몰수했지만, 이 사건으로 금교령은 더욱 강화되고 쇄국정책은 더욱 강고해졌다.

순례는 신자 재발견의 무대 나가사키의 26위 성당인 오우라천주당에서 막을 내린다. 1865년 오우라천주당에서의 카쿠레 키리시탄과 프티장 신부의 만남은 극적이었다. 공식 금교령 기간만 260년에 이르는 박해를 견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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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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