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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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첫 시집 표지는 주님 탄생 예고 성화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 정지용 프란치스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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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의 삶과 문학 세계를 전시하는 정지용문학관 전경. 출처=정지용문학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향수’이다.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이 시는 정지용(프란치스코)이 일본으로 유학 떠나기 전에 썼다. 다시 볼 수 있는 고향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노래했다. 마치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처럼. 수필가 피천득은 ‘향수’를 다시 반갑게 읽고는 오래 잊었던 ‘향수’가 새로워졌다고 했다. 또한, 재가 식어진 질화로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돋아 고이시는 짚베개가 그리워졌다고 했다. 그래서 질화로 하나 갖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해 다니기도 했다. 또한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는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 여인상이라 했다.

 

스승에게 민족 정서와 언어를 배우다

‘정지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그란 안경과 반듯한 가르마 그리고 두루마기이다. 정지용(鄭芝溶)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정지용의 어렸을 때 이름은 지용(池龍)이다. 어머니가 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어서 그렇게 지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교)에 입학했다. 휘문고보에는 선배로서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이 있었고, 후배로는 이태준이 있었다. 재학 중에 ‘서광’지 창간호에 소설 ‘삼인’(三人)을 발표했다. 휘문고보 문학동아리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아 ‘휘문’ 창간호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문학적 경험은 작가에 대한 그의 열망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정지용은 3·1 만세 운동에 휘문고보 주동자였다. 이 일로 안타깝게도 정학당했다.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는 휘문고보 졸업 후에 발표된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가 가득 담긴 시어로 이루어져 있다. 정지용에게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조선어연구회를 발족시킨 가람 이병기였다. 가람은 정지용이 휘문고보 시절에 조선어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가람에게서 민족 정서와 민족 언어를 배운 것이다.


 
▲ 가톨릭 신앙과 민족주의, 모더니즘을 융합시킨 거장 정지용 시인. 사진은 1930년대 초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정지용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그에게 모교 휘문고보가 학비를 대주었다. 조건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모교의 교사로 봉직한다는 것이었다. 도시샤대학에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야나기는 조선의 문화예술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으로 「조선과 예술」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정지용은 ‘윌리암 블레이크 시의 상상력’이란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그리고 교토의 조선 유학생 잡지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라는 시를 발표했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삐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
 

시 속에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한 젊은이의 고뇌가 깊이 서려 있다. 이때부터 일본의 문학지를 통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빼앗긴 작가의 꿈
 

귀국 후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로 꽤 오래 근무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창밖을 바라보면서 방긋방긋 웃었다. 어떤 제자가 당시 스승에 대한 글을 썼다.
 

“시인은 수업 시간에 시상이 떠오르면 ‘자습해!’ 하며 소리치곤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흥겨워 방긋방긋 웃으며 아름다운 시구를 담뿍 입속에 물어 혀를 굴리었다. … 중학교 3학년쯤 되면 시를 좋아하는 생도들이 생기게 되어 정지용 선생도 이런 제자들의 청을 들어 시에다 음을 붙여 성악가 못지않게 노래를 불렀다. 생도들은 박수는 물론 발을 굴리며 ‘앙코르’ ‘앙코르’를 외치며 교실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내가 본 시인’에서)
 

그러나 정지용은 교사가 된 것과 전쟁과 가난이 그토록 바라던 작가의 꿈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시인이 된 것을 “남들이 ‘시인, 시인’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당시 경향신문에 쓴 글이다.
 

“학생 속에서 청춘을 유실하고 청춘 틈에서 나는 산다. 학생과 청춘! 그들은 팔팔하고 싱싱하다. 괴상하고도 기발하다. 우스워서 요절할 적도 있고 화가 나서 역정이 날 때도 있다. … 나는 무수한 학생을 보아 왔고 이제토록 왕성한 학생 삼림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자식과 제자라는 사이에 인색한 경계선을 긋지 않을 만한 심정의 여유도 가져진다.”(‘학생과 함께’에서)
 

이렇게 정지용은 교직 생활에 대해 매우 복잡한 생각을 가졌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징병 갔다가 38선을 넘어 살아 돌아온 제자가 정지용을 찾아왔다. 스승은 형색이 남루한 제자를 허름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 술과 밥을 사 먹였다. 스승이 먼저 취했다. 스승은 주먹을 들고 눈을 부라리며 “이놈, 너의 동네에서는 선생님보고 동무라고 한다지! 너도 날보고 동무라고 할 테냐! 이놈”하고 말했다. “아니올시다! 그럴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영원히 선생님이지요. 이북에도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 후에 제자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에는 “스승 지용에게, 선생님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는 이제 속된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스승이라 불러들이겠습니다.” 정지용은 생각했다. 다음 기회에 돈이 생기면 그 제자를 다시 데리고 가서 “동무 선을아!” 하고 주정을 부리겠다고.


 
▲ 정지용은 자신의 첫 시집 표지에 천사 가브리엘 그림을 넣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시를 통해 신앙을 드러내다
 

정지용은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는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함께 참여한 사람은 박용철,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현대적 언어로 시를 쓰는 모더니즘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다. 정지용은 문예전문지 ‘문장’을 통해 후에 청록파 시인이 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을 발굴해냈다. 또한, 민족시인 윤동주도 정지용에 의해 문단에 등단했다. 정지용의 첫 시집은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는데, 제목은 「鄭芝溶詩集」(정지용 시집)이었다.
 

시집이 나오자 문단은 열광했다. 모윤숙은 시집을 읽고 “나는 이 시집 속에 가득 찬 조선말의 향기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윤동주는 「鄭芝溶詩集」에 “1936.3.19. 평양에서 구입”이라 쓰고 시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시문학’ 동인 박용철은 시집의 발문을 이렇게 썼다. “그는 한 군데 자안(自安)하는 시인이기보다 새로운 시경(詩境)의 개척자이려 한다. 그는 이미 사색과 감각의 오묘한 결합을 향해 발을 내어 디딘 듯이 보인다.” 시집의 표지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주님 탄생 예고’ 중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가져왔다. 주님 탄생 예고는 성모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잉태했음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이다. 이렇게 정지용은 자신의 첫 시집 표지에 성화를 넣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또한, 시집에 실린 많은 시가 신앙시이다. 대표적인 시가 ‘임종’, ‘갈리리 바다’, ‘그의 반’, ‘다른 하늘’, ‘또 하나 다른 태양’이다. 정지용은 시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노래했다.
 

 

‘영원한 나그네길 노자로 오시는 성주 예수의 쓰신 원광(圓光)! 나의 영혼에 칠색(七色)의 무지개를 심으시라’(‘임종’ 중)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그의 반’ 중)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五官)에 사무치지 않았으나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하늘을 삼으리라’(‘다른 하늘’)  

<계속>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 백형찬 전 서울예대 교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향수’이다.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이 시는 정지용(프란치스코)이 일본으로 유학 떠나기 전에 썼다. 다시 볼 수 있는 고향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노래했다. 마치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처럼. 수필가 피천득은 ‘향수’를 다시 반갑게 읽고는 오래 잊었던 ‘향수’가 새로워졌다고 했다. 또한, 재가 식어진 질화로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돋아 고이시는 짚베개가 그리워졌다고 했다. 그래서 질화로 하나 갖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해 다니기도 했다. 또한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는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 여인상이라 했다.



스승에게 민족 정서와 언어를 배우다

‘정지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그란 안경과 반듯한 가르마 그리고 두루마기이다. 정지용(鄭芝溶)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정지용의 어렸을 때 이름은 지용(池龍)이다. 어머니가 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어서 그렇게 지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교)에 입학했다. 휘문고보에는 선배로서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이 있었고, 후배로는 이태준이 있었다. 재학 중에 ‘서광’지 창간호에 소설 ‘삼인’(三人)을 발표했다. 휘문고보 문학동아리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아 ‘휘문’ 창간호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문학적 경험은 작가에 대한 그의 열망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정지용은 3·1 만세 운동에 휘문고보 주동자였다. 이 일로 안타깝게도 정학당했다.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는 휘문고보 졸업 후에 발표된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가 가득 담긴 시어로 이루어져 있다. 정지용에게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조선어연구회를 발족시킨 가람 이병기였다. 가람은 정지용이 휘문고보 시절에 조선어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가람에게서 민족 정서와 민족 언어를 배운 것이다.

정지용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그에게 모교 휘문고보가 학비를 대주었다. 조건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모교의 교사로 봉직한다는 것이었다. 도시샤대학에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야나기는 조선의 문화예술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으로 「조선과 예술」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정지용은 ‘윌리암 블레이크 시의 상상력’이란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그리고 교토의 조선 유학생 잡지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라는 시를 발표했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삐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

시 속에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한 젊은이의 고뇌가 깊이 서려 있다. 이때부터 일본의 문학지를 통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빼앗긴 작가의 꿈

귀국 후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로 꽤 오래 근무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창밖을 바라보면서 방긋방긋 웃었다. 어떤 제자가 당시 스승에 대한 글을 썼다.

“시인은 수업 시간에 시상이 떠오르면 ‘자습해!’ 하며 소리치곤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흥겨워 방긋방긋 웃으며 아름다운 시구를 담뿍 입속에 물어 혀를 굴리었다. … 중학교 3학년쯤 되면 시를 좋아하는 생도들이 생기게 되어 정지용 선생도 이런 제자들의 청을 들어 시에다 음을 붙여 성악가 못지않게 노래를 불렀다. 생도들은 박수는 물론 발을 굴리며 ‘앙코르’ ‘앙코르’를 외치며 교실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내가 본 시인’에서)

그러나 정지용은 교사가 된 것과 전쟁과 가난이 그토록 바라던 작가의 꿈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시인이 된 것을 “남들이 ‘시인, 시인’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당시 경향신문에 쓴 글이다.

“학생 속에서 청춘을 유실하고 청춘 틈에서 나는 산다. 학생과 청춘! 그들은 팔팔하고 싱싱하다. 괴상하고도 기발하다. 우스워서 요절할 적도 있고 화가 나서 역정이 날 때도 있다. … 나는 무수한 학생을 보아 왔고 이제토록 왕성한 학생 삼림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자식과 제자라는 사이에 인색한 경계선을 긋지 않을 만한 심정의 여유도 가져진다.”(‘학생과 함께’에서)

이렇게 정지용은 교직 생활에 대해 매우 복잡한 생각을 가졌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징병 갔다가 38선을 넘어 살아 돌아온 제자가 정지용을 찾아왔다. 스승은 형색이 남루한 제자를 허름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 술과 밥을 사 먹였다. 스승이 먼저 취했다. 스승은 주먹을 들고 눈을 부라리며 “이놈, 너의 동네에서는 선생님보고 동무라고 한다지! 너도 날보고 동무라고 할 테냐! 이놈”하고 말했다. “아니올시다! 그럴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영원히 선생님이지요. 이북에도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 후에 제자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에는 “스승 지용에게, 선생님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는 이제 속된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스승이라 불러들이겠습니다.” 정지용은 생각했다. 다음 기회에 돈이 생기면 그 제자를 다시 데리고 가서 “동무 선을아!” 하고 주정을 부리겠다고.



시를 통해 신앙을 드러내다

정지용은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는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함께 참여한 사람은 박용철,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현대적 언어로 시를 쓰는 모더니즘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다. 정지용은 문예전문지 ‘문장’을 통해 후에 청록파 시인이 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을 발굴해냈다. 또한, 민족시인 윤동주도 정지용에 의해 문단에 등단했다. 정지용의 첫 시집은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는데, 제목은 「鄭芝溶詩集」(정지용 시집)이었다.

시집이 나오자 문단은 열광했다. 모윤숙은 시집을 읽고 “나는 이 시집 속에 가득 찬 조선말의 향기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윤동주는 「鄭芝溶詩集」에 “1936.3.19. 평양에서 구입”이라 쓰고 시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시문학’ 동인 박용철은 시집의 발문을 이렇게 썼다. “그는 한 군데 자안(自安)하는 시인이기보다 새로운 시경(詩境)의 개척자이려 한다. 그는 이미 사색과 감각의 오묘한 결합을 향해 발을 내어 디딘 듯이 보인다.” 시집의 표지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주님 탄생 예고’ 중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가져왔다. 주님 탄생 예고는 성모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잉태했음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이다. 이렇게 정지용은 자신의 첫 시집 표지에 성화를 넣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또한, 시집에 실린 많은 시가 신앙시이다. 대표적인 시가 ‘임종’, ‘갈리리 바다’, ‘그의 반’, ‘다른 하늘’, ‘또 하나 다른 태양’이다. 정지용은 시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노래했다.



‘영원한 나그네길 노자로 오시는 성주 예수의 쓰신 원광(圓光)! 나의 영혼에 칠색(七色)의 무지개를 심으시라’(‘임종’ 중)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그의 반’ 중)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五官)에 사무치지 않았으나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하늘을 삼으리라’(‘다른 하늘’) <계속>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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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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