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정부교구 최북단 공소인 적성본당 백학공소는 6·25 당시 이 지역에서 전사한 모든 영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의 집이다. 사진은 2007년 설립된 백학공소 전경. |
공소(公所)는 본당보다 작은 단위로 주임 사제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며 사목하는 본당 구역 내 신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박해 시대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외진 곳으로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교우촌 중심에는 회장의 지도로 운영되는 공소가 자리했다. 공소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뿌리이며 신앙의 못자리이다. 안타깝게도 공소는 도시화한 현대 사회에서 점차 쇠락하고 잊히고 있다.
목숨을 담보로 함께 삶의 자리를 일구고 영혼의 평화를 안겨주는 거룩한 기쁨을 나눴던 신앙 선조들의 삶 터 ‘공소’를 연재한다. 이번 새 연재물을 통해 모든 공소가 신앙의 유산으로 잘 보존될 수 있길 희망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소박한 마음으로 새 연재 ‘공소(公所)’를 준비할 때 불쑥 떠오른 복음 말씀이다. 아마도 이번 기획 목적이 그러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평화를 일구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공소를 찾기 시작했다. 모든 공소가 마땅히 해당하지만 보다 눈에 잡히는 구체적인 장소를 선정했다. 바로 의정부교구 적성본당 백학공소이다.
의정부교구 최북단 공소백학공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백두2길 2에 자리하고 있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2㎞ 후방에 있는 의정부교구 최북단 공소이다.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는 38도선 북쪽에 위치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ㆍ25전쟁 후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해 우리 땅이 됐다.
두일리(斗日里) 꽃뫼 골짜기 볕 좋은 남쪽 구릉에 나지막이 지어진 백학공소는 탁 트인 너른 들판을 품고 있다. 평온한 이 너른 들판은 6ㆍ25 전쟁 당시 아비규환 죽음의 땅이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임진강 접경 격전지였던 적성에서 목숨을 잃었다. 1951년 4월 22일부터 닷새간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임진강 전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중공군 30만여 명과 맞서 싸웠다. 유엔군 중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 연대 제1대대 756명의 병사가 중공군 3만여 명을 상대로 백학공소 인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이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군 59명이 전사했고, 98명이 행방불명됐다. 530명이 포로가 됐고 살아남은 자가 69명에 불과했다. 탄약이 다 떨어져 맥주병을 중공군을 향해 던질 만큼 결사항전을 한 영국군 덕분에 유엔군은 후퇴해 서울 북부에서 방어를 준비할 수 있었다.
백학면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전투가 바로 ‘네바다 전초기지 전투’이다. 유엔군과 중공군이 1953년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닷새간 공방전을 펼쳤다. 미 해병 1사단이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 120사단을 간신히 막아냈다. 이 전투에 승리할 수 있었던 유엔군의 숨은 주역은 ‘지게 부대’라고 불린 이름없는 주민들과 제주도산 군마(軍馬)인 ‘아침 해’였다. 한 치도 밀리지 않는 공방전이 계속되자 백학면 주민들이 지게를 지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고지에 있는 미 해병에게 탄약을 보급하고 부상병을 후송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지켜본 미군들은 주민들을 ‘지게 부대’라며 “영웅”이라고 고마워했다. 또 군마 ‘아침 해’는 총탄을 맞고도 피를 흘리며 하루 동안 51차례나 홀로 고지를 왕복하며 4톤의 탄약과 부상병을 실어날랐다. 미군은 아침 해에 ‘무모할 만큼 용감하다’는 뜻의 영어 이름 ‘레클리스(Reckless)’를 지어줬다. 아침 해는 1959년 군마로서는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하사’가 됐다.
두 달 후 백학공소 일대에는 또 한 차례 거센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 협정이 한창일 때라서 한 뼘의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유엔군과 중공군 간에 펼친 공방이었다. 양측은 1953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닷새 동안 20여만 발의 포격과 67차례의 폭격을 퍼부었다. 유엔군 150여 명, 중공군 1000여 명이 전사했다. 유엔군은 전사자 처리를 위해 연천에 임시 화장장을 마련했다. 또 대한민국 정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1996년 백학공소 인근 적성면 자장리에 6ㆍ25전쟁 때 전사한 적군의 유해를 모두 가져와 ‘북한군/ 중국군 묘지’를 조성했다.
|
▲ 공소 내부 |
|
▲ 백학공소는 2010년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자들이 파견돼 관리 운영하고 있다. 성당 안에 소박하게 꾸며져 있는 성모상이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
2007년 설립, 샬트르 수녀회 관리 운영백학공소는 평신도 선교사 김윤애(율리안나)씨의 헌신적 노력으로 2007년 6월 7일 설립됐다. 이후 2010년 2월 26일 의정부교구장 이한택 주교의 승인과 계약에 따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도자를 파견해 오늘까지 백학공소를 관리, 운영하고 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백학공소 수녀원인 ‘멜 베아트릭스의 집’을 공소 인근에 짓고 수도자 4명을 파견했다. 이때부터 백학공소는 6ㆍ25 당시 이 지역에서 전사한 모든 영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의 집이 되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초대 한국 관구장이었던 베아트릭스 드 마리 오두아르 수녀는 6ㆍ25 전쟁 때 피랍돼 중강진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행진’ 도중 북한군에 피살돼 순교했다.
누구든 기도하고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라고 적힌 공소 간판이 방문자를 반긴다. 백학공소에서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희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돼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아침부터 저녁 기도 전까지 누구든 기도하며 머물다 갈 수 있었다. 성당뿐 아니라 차를 마시며 잠시 쉴 소박한 공간이 꾸며져 있다. 매월 셋째 주일 오전 7시 30분에 공소 주일 미사가 봉헌된다.
교적상 공소 신자 수는 120명이지만 대부분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이다. 그나마 하나 있던 레지오 마리애 일치의 모후 쁘레시디움도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활동을 멈췄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기도와 공소 관리뿐 아니라 임진강 일대를 골골이 방문하면서 환자들을 위로하고 교우들을 돌보고 있다. 또 멜 베아트릭스의 집에서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방도 운영하고 있다.
박금희 가타리나 수녀는 “코로나 이후 거동이 어려워 냉담하는 신자들이 늘어 너무 안타깝다”면서도 “백학공소는 이 지역에서 전사한 모든 영혼과 베아트릭스 수녀님을 비롯한 6ㆍ25전쟁 전후 순교자들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의 집이기에 소중히 가꾸고 있다”고 말했다.
방문 문의 : 031-835-6025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