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부터 대학생까지 남자 10명과 40대 중반의 남자가 함께 산다? 삼촌과 조카 사이라기엔 얼굴에 닮은 구석이 없다. 선생님과 학생 사이라기엔 한집에 사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 침대에서 뒹굴며 장난치고, TV를 더 보겠다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것을 보면 아들이 여럿인 여느 가정집 같다. 이 집에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걸까? 2023년을 시작하며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고 있는 북한이탈청소년 그룹홈 ‘가족’을 찾았다.
10명의 남자아이들 한집에 모이다
강추위가 몰아쳤던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그룹홈 ‘가족’의 대표인 김태훈(제랄드·47)씨의 집은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대부분인 탓에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갔다 밤늦게 돌아온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집안 정리를 하고, 다음 날 떠날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던 김 대표는 이 가정의 아빠이자 엄마다. 이윽고 이 집에서 가장 어린 초등학교 5학년인 지준성군이 들어왔다. 낯선 손님을 보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손발을 씻은 뒤 TV 앞에 앉는다. 방에 있던 대학생 형은 막내가 잘 들어왔는지 얼굴을 확인하곤 스마트폰에 집중한다. ‘살가운 인사 따윈’ 나누지 않는 여느 집 형제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서울 정릉동에 위치한 북한이탈청소년 그룹홈 ‘가족’의 풍경이다. 초등학생 1명과 중학생 3명, 고등학생 4명에 대학생 2명까지. 이 집에 살고 있는 10명의 아이들은 대부분 혼자 남한으로 건너왔다. 7살 때 혼자 남한으로 넘어온 아이는 이제 중학생이 됐다.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생사여부를 알 수 없기에 이들은 남한에 가족이 없다. 먹고 사는 일이 먼저였기에 외로움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을 아이들. 김 대표는 그런 아이들에게 가족이 되고자 했고 2006년 그룹홈 ‘가족’을 꾸렸다. ‘가족’안에서 그는 아이들이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버텨낼 수 있도록 단단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건강하고 단단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룹홈 ‘가족’의 큰형 강군성(26) 씨는 “저희를 잘 키워주셔서 삼촌에게 늘 감사하다”라며 “‘가족’은 제2의 집이자 삼촌은 제게 부모님과 같다”고 말했다.
작고 힘없는 아이의 고통, 청년의 마음을 흔들다
“북한은 물론이고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직장인이던 20대 후반, 김 대표는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좋아해 직장동료에게 이끌려 봉사활동을 간 것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아이들과 놀아주면 된다고 해서 따라 간 곳이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에서 주관했던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봉사활동이었어요. 아이들을 좋아서 꾸준히 하다 보니 하나원 봉사까지 하게 됐고, 거기서 하룡이를 만났죠.”
엄마가 지방에서 일을 하느라 종일 혼자 지내야 했던 북한에서 온 초등학교 4학년 아이. 한두 번 들러 밥 해주고 이야기를 나눈 뒤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이제 집에 갈 거예요?”라는 아이의 말이 마음을 흔들었다. 무심코 뱉어낸 “같이 자줄까?”라는 말은 김 대표가 16년간 북한이탈청소년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시작이 됐다.
“북한에 대해 몰랐기에 편견이 없었고, 단지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적인 행동을 감내해야 하는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게 다였어요. 제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죠.”
정치적인 충돌이나 이념적인 차이는 힘없는 아이가 다쳐야 할 명분이 돼서는 안됐다. 김 대표는 그저 아이가 티 없이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이의 가족을 자처했다. 그렇게 ‘가족’이 꾸려졌고 어느새 11명의 대가족을 일궜다.
이 집에는 아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은 없지만, 삼촌이 반드시 해주는 것은 있다. 아침밥과 생일파티, 그리고 아이들 부모님을 위한 차례상이다.
“매일 아침밥을 세 번 차리는데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어요.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공부도 잘되니까요. 그리고 고향에서는 생일에 쌀밥 먹는 게 전부인 아이들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해주고자 각자 생일날 꼭 파티를 해주죠. 독립해서도 부모님 기리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서 설과 추석에 각자 차례상을 차리고 절을 올립니다.”
10명의 아이를 챙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집 아이들이 나가서 주눅 들지 않고 사랑받고 자랐다는 게 느껴지도록 뭐든지 해주고 싶다”는 김 대표는 자신보다 아이들이 먼저인, 진짜 부모가 돼가고 있었다.
평화를 향한 그룹홈 ‘가족’의 여정
남자아이 10명을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보낸 김 대표는 학교에서 소위 치맛바람이 센 학부형이라 불린다. ‘북한’이라는 프레임으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이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면 ‘악바리’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16년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왜 없었겠어요. 한번은 또래 친구가 저희 아이를 간첩이라고 국가정보원에 신고한 사건이 있었어요. 학교에 소문이 나서 저희 아이가 크게 상처를 받았죠. 아이에게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테니 너는 학교 지각하지 말고 교복 똑바로 입고 다니고 책잡힐 일 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곤 제가 일을 해결했죠.”
김 대표는 북한이탈청소년과 함께한 시간을 ‘편견을 견뎌내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룹홈 ‘가족’의 아이들은 편견을 견뎌내며 성장했지만 우리사회는 16년 전에 멈춰있는 게 안타깝다고 김 대표는 덧붙였다.
“16년 동안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성인이 됐고, 멋있고 늠름하게 성장했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북한이탈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2006년에 멈춰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편견이 담긴 시선으로 북한이탈주민을 바라보죠.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북한은 남한을 향해 미사일을 쏘며 험한 말을 쏟아낸다. 이를 접한 사람들이 ‘북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긴 어렵다. 김 대표는 ‘북한’이 아닌 ‘사람’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같이 학교를 다니고, 지금 버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북한에서 온 사람일 수 있다”며 “이미 우리는 북한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모르고 있을 뿐이죠”라고 말했다. 그에게 북한이탈주민은 ‘통일을 준비하라고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과 같았다.
2011년 세운 사단법인 ‘우리들의 성장 이야기’는 북한사람과 잘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됐다. 청년들이 통일과 평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동서남북 국제 워크캠프’를 주관하고 이 프로그램 안에서 단편영화를 제작해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 놨다. 문을 두드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김 대표는 ‘가족’의 아이들을 위해 단단히 자물쇠가 채워진 문을 수없이 두드렸다. 언제 열릴지 모르지만 훗날 그 문을 잘 건너가기 위해 10명의 아이들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김 대표. 그에게 통일은 “우리 아이들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쁜 순간”이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