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건강을 이유로 교황직을 사임함으로써 엄청난 역사적 선례를 남겼다. 이는 인간적 한계와 시대적 요청, 하느님 백성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결단이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을 “교회와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이유는 교황 사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그는 시대가 요청한 ‘전통 신앙의 수호자’였으며 ‘하느님 사랑’을 가장 위대하게 선포한 인물이었다.
온전히 자유로운 교황직 사임
1415년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은 선종에 앞서 교황직을 사임했다. 약 600년 뒤인 2013년 2월 11일, 베네딕토 16세는 낮 12시 교황청에서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2월 28일 오후 8시를 기해서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라틴어로 작성된 짤막한 사임 선언문에서 “하느님 앞에서 양심을 성찰하면서 ‘급변하는 세상’,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로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는데 요구되는 ‘몸과 마음의 힘’이 없다고 확신하고 ‘온전한 자유’로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말했다.
갑작스런 결정인 듯했지만 그의 사임은 오랫동안 감지됐었다. 2010년 독일 언론인 페터 제발트와의 인터뷰에서 몸과 마음의 한계를 느낄 때, 교황은 “사임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의무”라고 말했다. 형 게오르그 라칭거 몬시뇰은 그가 “수개월 동안 사임을 고민해왔다”고 말했고, 영국성공회 로윈 윌리엄스 주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올바른 양심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임 발표 사흘 전 로마교구 신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십자가는 서로 다른 모습일 수 있다”고 말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교황직을 수행해야 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고통과 희생, 시대의 요청에 따라 교황 종신직에 새로운 선택을 부여한 그의 사임, 모두 십자가를 지는 고뇌의 선택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사임 의사를 담은 서한을 교황청 국무원장에게 맡김으로써 그 선택은 새로운 전통이 됐다.
개혁을 지지한 젊은 신학자
훗날 베네딕토 16세가 된 요제프 라칭거는 1927년 독일 바이에른주의 한 평범하고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9년 소신학교에 입학했고 1951년 6월 친형 게오르그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2년 뒤 신학박사 학위를, 1957년에는 교의신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고, 프라이징 철학-신학대학, 본 대학, 뮌스터 대학, 튀빙겐 대학, 레겐스부르크 대학 등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탁월한 학덕으로 젊은 시절부터 이미 존경받는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쾰른대교구장 조셉 프링스 추기경의 신학 자문가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여했다. 진보적 쇄신파에 속했던 그는 개혁에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완고한 주교들의 결정으로 폐기된 의제들을 강하게 비판하곤 했다. 사실 그는 애당초 경직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시대적 변화에 적극 부응해 각성과 변화를 촉구한 공의회 정신에 민감한 신학자였다.
전통의 수호자,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젊은 신학자 요제프 라칭거는 1977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뮌헨-프라이징대교구장에 임명됐고, 석 달 뒤 추기경에 서임됐다. 1981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교황청 신앙교리부 장관에 임명됐고 2005년 4월 19일 교황으로 선출됐다.
라칭거의 신학사상은 ‘전통의 옹호’였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공의회 정신을 지지했지만 급격한 개혁이 빚어낸 혼란을 목격하면서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확신했다.
신앙교리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기간 동안 그는 개혁의 기치 아래 진행된 급진적 비약으로 인한 교회 전통의 붕괴를 우려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속에서 신앙의 가치를 수호해야 했고, 전통적 성윤리를 비롯해 새롭게 대두된 생명윤리 문제에도 대처해야 했다. 성소 격감에서부터 여성사제와 사제 독신제 등 직무사제직 문제에도 답해야 했다. 억압적 정치 상황 속에서 대두된 급진적 해방신학과 사회개혁사상, 종교다원주의 등 현대 세계와 사회 속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사조 앞에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수호해야 했다.
그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재위 기간 동안 교의와 윤리 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입장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동성애, 자유주의 신학, 평신도 직무의 오용, 엇나간 신학자들, 여성 사제직, 여성 수도자들의 페미니즘, 동거, 낙태, 전례 개혁, 록음악 등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입장은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신앙교리부 장관으로서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들의 입을 닫게 했고, 가톨릭 신학에 마르크시즘을 이용하는 것을 비판했으며, 상대주의적 사고를 경계해 아시아 신학의 일부 엇나간 경향을 징계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가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환호와 함께 실망과 우려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추기경들은 그를 선택했고, 성령이 함께하심을 믿기에, 이는 분명 하느님의 섭리였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콘클라베 시작 만 하루도 안 돼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6세는 첫 축복 메시지에서 자신을 ‘주님 포도밭의 겸손한 일꾼’으로 불렀다. 완고한 전통주의자로 보였던 그는 이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쁨’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강조했다.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진면모를 담은 것이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다. 그는 회칙이 두 가지 질문 즉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말했다. 깊은 신학적·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베네딕토 16세는 “적대감과 탐욕이 지배하고, 종교가 오히려 증오의 절정을 이루는 시대에 우리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살아계신 하느님이 필요하다”며 사랑의 의미가 퇴색해버린 오늘날 참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처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강조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교황직 수행 전체를 일관하는 가장 커다란 주제가 됐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재위 마지막 시기 동안 미성년자 성추행 스캔들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됐고, 교황청 기밀문서가 유출된, 이른바 ‘바티리크스’(Vatileaks) 스캔들이 큰 혼란을 가져왔다. 세속 언론들은 이와 관련해 빈번하게 의혹을 제기했으나 그는 단호하고 엄격하게 교회 안의 추문들에 대처했다. 미성년자 성추행 문제에 대해 엄격한 규정들을 도입했고, 교황청 재정 추문과 관련해 불법적인 돈 세탁 금지 법안을 제정한 것도 역시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이었다.
그가 마침내 2013년 교황직 사임을 발표했을 때에도, 혹자는 바티리크스 등 교황청과 가톨릭교회내의 다양한 추문들을 그 원인으로 추정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양심’, 하느님과 교회, 하느님 백성에 대한 깊은 사랑의 결단이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