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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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땀 한 땀, 어떤 전례복이든 척척 만드는 ‘솔샘일터’

[타인의 삶] (12)‘솔샘일터’ 장영오·신덕례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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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샘일터’ 조합원 신덕례씨(왼쪽)와 장영오씨가 갓 완성한 전례복에 기대 사진을 찍고 있다.



‘3만 벌.’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소속 봉제생산협동조합 ‘솔샘일터’의 30년 땀방울이 모인 결과물이다. 수단부터 제의ㆍ수도복ㆍ독서자복ㆍ성가대복ㆍ복사복 그리고 ‘귀천복(수의)’까지, 솔샘일터는 늘 열 명도 채 안 되는 인원으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많은 옷을 지어왔다. 새 사제가 탄생하는 거룩한 장면에도, 새 복사가 처음 미사 초를 밝히는 순간에도 조합원의 땀과 열정이 배어 있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2009년 선종 때 입은 제의도,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물로 받은 장백의도 솔샘 작품이다.

오랜 시간 한결같이 재봉틀을 돌리며 복음 정신을 구현해온 솔샘일터. 비록 조합원은 두 명으로 줄어들고, 코로나19로 3년 만에야 다시 일을 시작했음에도 이들은 여전히 희망차다.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타인의 삶, 삼양동 솔샘일터를 지키는 ‘짝꿍’ 조합원을 만났다.





주님을 믿고 버틴 코로나 3년


“자꾸 ‘솔샘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나나 봐요. 근데 우리는 절대 문 안 닫아요. 둘이서 힘닿는 데까지 할 거예요.”

솔샘일터를 채운 재봉틀 소리보다 더 크고 힘찬 목소리로 장영오(클라라, 61)씨가 말했다. 30년 베테랑인 그의 손을 거친 옷감은 마술처럼 복사복으로 재탄생했다. 새 작품을 어루만지는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완성된 옷을 작은 손수레에 싣는 이는 또 다른 조합원인 신덕례(루피나, 63)씨다. 솔샘일터가 있는 산동네는 워낙 경사가 가파른 데다 골목이 좁아 택배 수거가 안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점심때마다 걸어서 15분 거리인 우체국에 가 택배를 부친다.

매일 반복적인 일상인데도 짝꿍 조합원은 “하루하루가 귀중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오랜 기다림 끝에 재개한 노동이니 더욱 기쁘고 뿌듯할 터다. 모든 교구에서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면서 솔샘일터도 일감이 뚝 끊겼다. 과거와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었다. 일터에 나오는 날보다 집에서 쉬는 날이 더 많던 시절. 장씨는 “3년 동안 안 망한 게 신기하지 않으냐”며 “말 그대로 주님 믿고 버틴 덕”이라고 했다.

“보통 주문이 전화로 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둘이 이렇게 말했죠. ‘하느님이 설마 우리를 굶겨 죽이기야 하시겠어? 오랫동안 달려온 우리에게 쉴 기회를 주신 거로 생각하자’고요. 하하”





▲ 재단 중인 신덕례씨와 재봉하는 장영오씨.



노동으로 복음화를 이룬 솔샘일터

이제 솔샘일터 작업대 윗벽에는 주문명세서와 고객 요구사항을 적은 쪽지가 제법 많이 붙었다. 솔샘 조합원들은 일 처리도 빠르고 정확하기로 정평이 났다. 둘이서 10벌을 짓는 데 사흘이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손바느질로 단추를 일일이 다는 등 섬세함도 갖췄다. 30년 동안 축적된 솜씨다.

솔샘일터는 1993년 당시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 이기우 신부가 삼양동 산동네에서 여성 주민 세 명과 함께 출자해 세웠다. 저소득층 지역민이 조합 ‘주인’이 돼 경제적 자립을 이루자는 취지였다. 그 세 명 중 한 명이 바로 장씨다. 원래 동대문시장에서 재봉 일을 하던 그는 밤 9시가 넘어 퇴근하는 날이 잦았다. 어린 아들은 어머니를 기다리다 지쳐 먼저 잠들기 일쑤였다. 그런 장씨 가족을 안타깝게 여긴 옆집 이웃 이 신부가 “협동조합을 만들어 일해보자”고 권유했다. 1년간 이 신부와 협동조합을 준비하면서 장씨는 자연스레 가톨릭에 관심이 갔고, 아들과 세례를 받았다.

신씨는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합류해 25년째 일해왔다. 솔샘에 온 첫날, 그는 평소 생각한 재봉공장과는 딴판인 조용하고 소박한 모습에 당황했다. ‘월급도 제대로 안 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집에 돌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신문을 뒤져봐도 좀처럼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닌가. 결국, 일주일 만에 돌아온 신씨는 첫 우려가 무색하게 금세 솔샘에 ‘젖어들었다’. 이내 온 가족이 가톨릭 신자가 됐다.

“조합원끼리 서로 나눠 먹을 줄 알고, 신부님도 잘 챙겨주시고. 참 따뜻해서 좋았어요. 설립 15주년에는 신부님이 15일 동안 저희 일본 여행도 시켜주셨다니까요. 평생 잊지 못할 기쁨이었어요.”



빵 쪼가리라도 먹을 수 있음에 감사


강산이 세 번 변할 동안 솔샘일터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신앙 열기가 가라앉으며 점차 일감이 줄었다. 조합원들도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 ‘몸이 아파서’ 등 저마다 이유로 떠나갔다. 그렇게 장씨와 신씨 단둘이서 솔샘을 지켜온 지도 어느덧 7년. 그간 여정을 되돌아보는 이들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겁나 힘들게 살았죠. 사람이 많을 땐 빚도 많았어요. 일이 없어도 사람 수대로 급여를 줘야 하니깐요. 그래서 줄이고, 줄이면서 5번이나 이사해 이곳 삼양동선교본당 건물에 왔어요. 예전에 본당에서 취약계층 상담센터로 쓰던 곳인데, 안전하고 편하게 일하라고 저희에게 내준 거죠. 크기가 아주 넓지 않지만 참 아늑하고 편한 일터예요.”

듣고 보니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낡은 에어컨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여덟 명이 일하던 작업장에서 쓰던 걸 그대로 들고왔다고 한다. 그 앞 조그만 식탁 유리 아래는 솔샘일터에서 제의를 맞춘 새 사제들 수품 상본이 끼워져 있다. 많은 수가 그대로 솔샘일터 단골이 됐다. 두 사람은 “잊지 않고 솔샘일터를 찾아주는 분들만 있어도 솔샘은 버틸 수 있다”며 “그래서 저희가 맨날 하는 말이 ‘떨어지는 빵 쪼가리만 먹어도 된다’”라고 웃었다.

솔샘일터 짝꿍 조합원은 이야기하는 내내 입버릇처럼 ‘주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일하다 손가락을 다쳐도 더 심하게 다치지 않아 감사. 일감이 생각보다 적게 들어와도 아예 없지 않음에 감사. 둘이서 찌게 하나만 놓고 밥 먹어도 굶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누릴 수 있어 감사. 두 사람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솔샘일터를 지킬 수 있음에 감사하다”며 미소 지었다.

“다른 재봉공장보다 월급은 적고, 힘은 더 들어도 우리에겐 솔샘일터가 최고거든요. 아프고 나이 들어서 일 못 하게 될 때까지 계속 옷 만들 거예요. 이번 성탄에 일감이 많이 안 들어왔으니 부활엔 주님께서 더 많이 주시지 않겠어요?”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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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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