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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금경축을 맞고 있는 이팔종 수사(맨 오른쪽)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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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렁크 공장에서 작업 중인 젊은 시절 이팔종 수사(맨 왼쪽)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제공 |
국내에서 자생한 첫 한국 남자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2010년 처음으로 금경축까지 맞은 이팔종(토마스, 83) 수사. 입회부터 따지면 66년이라는 세월을 수도원에서 보낸 셈이다. 지금도 그는 젊은 수사들과 함께 행복한 수도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축성 생활의 날(2월 2일)을 맞아 첫 국내 자생 수도원에서 첫 금경축을 한 이팔종 수사를 만났다. 그의 기억을 따라 수도 생활의 발자취를 걸어보고, 희망의 메시지를 들어본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열일곱, 수도원으로 떠난 여행
가난이 가난인 줄도 모르던 시절, 이 수사 역시 중학교도 입학하지 못한 채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 와중에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이 수사는 큰형님 권유에 옹기 만드는 일을 배웠다. 1년만 같이 일하면, 공부할 수 있는 소신학교를 보내준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그해 형님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부모보다도 더 의지했던 형님이었기에 이 수사 역시 길을 잃어버렸다.
그때 공소 회장이 건네준 경항잡지를 보게 된 이 수사. 거기서 13살에 순교한 성 유대철(베드로) 전기를 읽고 깊은 감화를 받은 그는 신앙심에 불타올랐다. 공소 회장은 그런 그를 보고 서울에 수도원이 있으니 한 번 가보라고 권유했다. 어디에 무슨 수도원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는 이미 수도자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 길로 바로 집을 나섰습니다.”
1957년,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깊은 신앙심을 지녔던 어머니는 이 수사의 결정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길을 축복했다.
꼬박 3일 걸렸다. 수도원에 입회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서 명동대성당까지 이동한 기간이다.
“장호원읍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걷다가 자다가 걷다가 그렇게 무작정 서울역까지 갔죠.”
서울역에 도착하긴 했지만, 수도원이 어디 있는지 몰랐던 이 수사는 일단 눈에 보이는 명동대성당으로 향했다. 마침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수사들이 명동성당 한편에서 천막을 짓고 작업하고 있었다. 수사들은 6·25 전쟁 때 영국군이 가져온 트렁크를 본 딴 여행용 가방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일에 투입됐다. 당시 모든 유명 백화점에 납품될 정도로 히트를 쳤기 때문에 일손 하나가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성북동 수도원을 지었다.
“새벽 미사 후 온종일 작업했습니다. 이게 무슨 수도 생활인가 싶어 일주일 하고 나가겠다고 말을 했죠. 그때 수도회 창설자 방유룡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깊은 성덕으로 제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신부님을 보고 다시 살아봐도 되겠다 다짐했죠.”
60년이 훌쩍 넘은 수도 생활
두 달 후 마침내 완공된 성북동 수도원으로 들어가 꿈에 그리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1960년 첫서원을 하고 1964년 종신서원까지 했다.
“지금처럼 양성과정이 체계적으로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기도하고 작업하다 틈틈이 영성 서적 읽고, 그게 전부였죠.”
처음 그가 맡은 직책은 주방일과 가방 만드는 일이었다. 밥하다 내려가서 가방 만들고 짬이 나면 영적 독서를 했다. 1964년부터는 목공일을 배우면서 인천 고잔성당, 덕적도성당, 금호동성당, 이문동성당, 제주 면형의 집 등을 지었다. 그는 “허드렛일이었지만, 불평 없이 순명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단, 공부를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사제가 되고 싶다고 요청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까지 나와야 했기에 누군가는 편법으로 졸업장을 얻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수사는 불법에 타협하지 않고 방유룡 신부가 설파한 면형무아의 삶을 되새겼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성체인 면형을 마주하는 보편 사제직의 직무를 지닐 수 있습니다. 신부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그는 수사로서 지난 2010년 금경축을 맞았다. 수사로 살아온 세월만 50년을 맞은 순간이었지만 그때도 그는 “그저 때가 돼서 그런 것뿐”이라며 겸손함을 내비쳤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이다.
“뭐 하나 자랑할 게 없습니다.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마음으로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종신서원의 은총 덕분인지 지금도 여기 있네요. 아직까지 사랑받고 사는 기분입니다.”
수도자, 희망의 표상
그의 나이 83세. 사회에서는 장성한 손자가 있을 나이다. 이 수사 역시 현재 가장 큰 기쁨 중 하나가 손자 같은 젊은 수사들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손자 같은 수사들은 점점 줄고 있다.
지난해 발표한 한국 천주교회 통계를 보면 2021년 남자 수련자는 47명으로 전년 대비 20명 감소, 여자 수련자 244명으로 전년 대비 24명 감소했다. 남녀 모두 2011년부터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최근 수련자 감소율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한 명의 성소자도 없는 수도원이 늘어나고 있다. 수도 성소의 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수도 성소 감소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를 두고 이 수사는 “당연한 상황”이라며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한국 교회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방한한 1980~90년대에는 성소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며 “하지만 급성장이 꼭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오래 살다 보니 수도회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성장하고 쇠퇴하는 현재까지 모두 겪고 있습니다. 30~40년 전처럼 그렇게 성장하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겁니다. 사회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아요. 종교 자체에도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지요. 그런 젊은이들에게 성소자가 없으니 오라고 홍보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저 우리는 수도자로서 정체성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는 성소의 위기라고 진단하는 외부 시선에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끊임없이 찾으며 인내하고 살아가는 수도자의 삶을 담담하게 나눴다.
“그러는 과정 안에서 자신과의 싸움도 하고, 기도를 통해 영적 물적으로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다보면 응답이 올 것입니다.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요. 이 나이 먹도록 철이 안 들어서 그런지 걱정이 안 돼요. 수도자는 희망을 살아가는 사람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