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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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신미양요의 상흔 어린 초지, 한옥 공소의 정겨움 뽐내

[공소 公所] (4) 인천교구 온수본당 초지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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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공소는 근현대 한옥 성당의 내부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노출되어 있는 나무 보와 기둥이 정겹다.



병인박해와 프랑스의 보복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처음부터 박해자가 아니었다. 둘째 아들 이명복이 1863년 조선 제26대 고종 임금으로 즉위하자, 그의 부인 여흥 민씨가 운현궁 안채 이로당에서 감사 미사를 봉헌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 실세가 된 대원군은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당파 싸움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철폐하고, 명나라 신종 황제의 사당인 만동묘를 폐쇄했다. 또 양반에게도 세금을 거두고, 군 지휘권을 무관에게 돌려줬다.

대원군은 조선을 넘보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그는 승지 남종삼을 비롯한 천주교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6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와 영국이 힘을 모아 러시아인들을 조선 국경에서 몰아내 준다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르뇌 주교는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대원군의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던 중 대원군이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중신과 유림이 이를 비판하자 궁지에 몰린 대원군은 그 혐의를 벗고자 천주교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바로 1866년 병인박해이다.

대원군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은 곧바로 진행됐다. 프랑스 극동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침공해 강화도를 점령했다. 바로 병인양요이다. ‘양요’(洋擾)는 서양 세력이 일으킨 소요라는 뜻이다. 제1차 병인양요는 리델 신부와 최선일, 최인서, 심순여 등 3명의 조선인 신자들의 안내를 받은 프랑스 함대가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쳐들어왔다가 중국 산동성 지부(芝)항으로 돌아갔다.

대원군은 1차 병인양요 이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기에 양화진을 천주교인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인근에 새 형장을 만들어 천주교인들을 대학살 했다. 이 형장이 바로 ‘절두산이다.

프랑스 함대는 한 달 뒤 다시 강화도에 쳐들어왔다. 강화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한 달여 동안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한 뒤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국민인 선교사들을 학살한 데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고 조선 조정에 편지를 보냈다.



두 양요와 쇄국 정책

1871년 4월, 이번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했다. 신미양요이다. 미군은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해 포대를 부수고 강화도 점령을 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미군 소총은 사정거리는 900m, 조선군의 화승총 사정거리는 120m였다. 화력의 열세를 조선군은 맨주먹으로 메꾸었다. 백병전을 마다치 않고 항전한 조선군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초지진을 야습했고, 미군은 더 이상의 전쟁은 무모하다며 40여 일 만에 철군했다. 대원군은 병인ㆍ신미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쇄국만이 정권과 윤리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온 나라 안에 ‘척양척화비’(斥洋斥和碑)를 세우고 나라 문을 닫았다. 대원군의 강경한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신미양요 5년 뒤인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강제 개항을 하게 된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지 3년 만이다.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은 병인ㆍ신미양요와 1875년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외세와 맞서 항전한 격전지이다. 복원된 초지진에는 그때의 상흔이 남아있다. 진(鎭)은 조선 시대 해군 진영이다. 강화와 김포 사이에 있는 물길을 ‘염하’(鹽河)라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해 서해로 흐르는 물길이다. 양안 사이 거리가 1㎞ 남짓해 물살이 거세다. 조선 시대 이곳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해상 관문이었기에 강화 동쪽 해안에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가 설치됐고, 건너편 김포 서쪽 해안에는 덕포진이 운영됐다.



▲ 초지공소 전경. 초지공소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19세기 중반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 침탈을 노리던 외세를 맨 앞에서 항거했던 강화도 초지진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60여 년 이어온 신앙의 못자리

초지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천교구 온수본당 초지공소가 있다. 6ㆍ25 전쟁 휴전 후 초대 강화본당 주임인 장금구 신부가 강화도 선교를 자원했다. “강화도 온수리란 곳에 차를 내려 신자들이 있는가 찾아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옹기 굽는 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그곳에 가 보았다. 신자 170여 명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으나 다른 곳엔 교우가 없고 강화읍 대산리에 몇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구 10만이 넘는 강화군에 성공회당이 3개요, 개신교 예배당이 무려 60여 개가 있으나 성당은 공소만 둘, 그것도 인천본당에 속해 있어서 1년에 한두 번 신부가 다녀갈 뿐이었다.”(「강화성당 이야기」 54쪽, 장금구 신부 회고록 중에서) 장 신부의 말처럼 1928년 충남 서산군 팔봉면에 살던 양촌명을 비롯한 교우 9명이 온수리로 이주해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이들의 전교로 온수리에는 신자들이 점차 늘어갔다.

초지공소는 1958년 강화도 첫 본당인 강화본당이 세워진 이후 그다음 해인 1959년 설립한 유서 깊은 공소이다. 신자들은 초대 이왈용(베드로) 공소 회장의 사택을 임시 공소로 정해 공소 예절을 하며 신앙을 지켜왔다. 그러다 1961년 인천대목구가 설정되자 강화본당은 서울대목구에서 인천대목구로 관할이 이관됐다. 이때 당시 강화본당 보좌였던 메리놀외방선교회 패트릭 파터슨 신부가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804-1번지에 대지 681㎡를 매입해 80.7㎡ 규모의 한옥 공소를 지어 1961년 11월 14일 축복식을 거행했다.

제3대 강화본당 주임이 된 파터슨 신부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운영하면서 지역 개발과 청년 교육에 힘썼다. 이때 많은 이들이 천주교로 입교했고, 초지공소 신자 수가 40가구 120여 명으로 늘었다. 1997년에는 공소 건물을 오늘의 모습으로 보수했다.

너른 들판에 ‘ㄷ’자 형태의 조그마한 한옥으로 꾸며진 초지공소는 정겹다. 천장과 벽에는 나무 보와 기둥이 얼기설기 노출돼 있고 깨끗하게 회칠이 되어 있다. 성체를 모신 감실은 물론 제대와 신자석, 십자가와 수호성인인 요셉 성인상, 성모상, 제의를 보관하는 옷장 등 빠짐없이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

초지공소는 매월 2ㆍ4째 주일 오전 8시에 주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공소 신자 대부분은 80대이지만 공소 내부에 티끌 하나 없을 만큼 자부심을 품고 공소를 가꾸고 있다.

김태형(요셉) 회장은 “요즘엔 차가 있어 주일이면 본당 미사에 참여하는 교우들이 많지만, 농사일을 하다가도 공소에 들려 기도하는 교우들이 아직도 많다”며 “감실에 모셔진 성체를 함께 조배하고 교우들과 정담을 나누며 공소 생활을 하고 있다”고 수줍게 웃었다.

문의 : 032-937-1386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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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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