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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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대, 밝고 아름다운 동시로 아이 어른 모두를 위로하다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7) 윤석중 요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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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노래’는 윤석중(요한, 尹石重, 1911 ~2003)이 시를 짓고 윤극영이 곡을 붙였다. 윤석중은 1300편이 넘는 동시를 지었고, 그중 800여 편이 동요로 불렸다. 작품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30대에는 한 달에 예순 편 넘게 창작했다. 매일 일기처럼 동요를 쓴 것이다.





윤석중의 동요

사람들은 윤석중에게 “그동안 지은 동요가 몇 편이나 되냐?”고 묻는다. 그러면 “천 편”이라고 말하려다가 “천 편 남짓”이라고 답한다. 왜냐하면 ‘천 편’ 하면 천편일률이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밤낮 같은 소리’, ‘그게 그것’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라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또 사람들이 “대표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일 년만 기다려 달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답해온 것이 오래되었다. 혹시 나이가 더 들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기에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윤석중 동요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고향 땅, 새 신, 고추 먹고 맴맴, 달맞이, 기찻길 옆, 동대문 놀이, 달 따러 가자, 퐁당퐁당, 어린이날 노래, 새 나라의 어린이, 우리 산 우리 강, 졸업식 노래, 나란히 나란히, 앞으로, 옹달샘, 봄나들이, 옥수수나무, 산바람 강바람, 우산1, 낮에 나온 반달’ 이렇게 많았다. 모두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불렀던 동요이다. 나이가 든 지금도 이 동요들을 부르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윤석중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밝고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윤석중이 지은 동요는 한결같이 밝고 희망차다. 그 어둡던 일제강점기와 그 참혹했던 6ㆍ25 전쟁 때 지어진 동요가 그렇게 밝고 희망찼던 까닭은 무엇일까? 윤석중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어찌 해방 전만 그렇겠습니까? 38선의 기막힘, 6·25 동란, 겨레 싸움의 원통함, 남의 전쟁에 뛰어든 괴로움, 이런 일들이 연달아 생기는 동안 우리 겨레에게는 근심 걱정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슬프더라도 자는 시간, 노는 시간, 웃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동요에 있어서는 무겁거나 벅차지 않은 가볍고, 우습고, 재미나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홀로 살아남은 외톨이

윤석중은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회운동을 하던 지식인이었고, 어머니는 부농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윤석중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윤석중의 형제들은 8남매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형제들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막내로 태어난 윤석중만 살아남아 외톨이가 되었다. 윤석중의 이름을 ‘석중(石重)’이라고 지은 것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마라’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윤석중이 아홉 살 때 재혼했기에 서울 수은동 외가에 맡겨져 자랐다.

열 살에 교동보통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처음 배운 노래가 ‘하루(春)’라는 일본 창가였다. 우리말도 ‘봄’이 있는데 굳이 ‘하루’라고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봄’이란 동시를 지었고,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실렸다. 양정고보로 진학했다. 그해 ‘어린이’ 잡지에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 검은 눈은 성내어 뒤룩거리고 / 배는 불룩 내민 꼴 우습구나야”로 시작하는 ‘오뚝이’가 당선되었다. 어른의 모습을 오뚝이에 비유한 것이다. 윤석중은 동요를 창작하면 이를 들고는 홍난파, 윤극영, 박태준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나온 동요가 홍난파의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달마중’, 윤극영의 ‘흐르는 시내’, ‘제비 남매’, 박태준의 ‘맴맴’, ‘오뚝이’ 등이다.



동심을 잃지 않은 석중

윤석중은 10대 중반부터 천재 소년 예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의 동포들아 / 이천만민아 /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 나아오너라 / 우리 것 우리 힘 / 우리 재주로 / 우리가 만들어서 / 우리가 쓰자.” ‘조선물산장려가’ 물산장려운동을 기념하는 노래 현상 공모에 열다섯 살 학생의 작품이 당선된 것이다. 또한, 윤석중은 열여덟 살에 정순철과 함께 동요 ‘짝짜꿍’을 만들었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아빠 앞에서 짝짜꿍’으로 시작하는 이 동요는 ‘우리 애기 행진곡’이란 제목으로 신문에 실렸다.

동요가 발표되자 인기가 폭발했다. 경성 라디오 방송이 노래를 내보내자 누가 만들었냐는 문의가 쇄도했고, 재방송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또한, 어린이 행사에선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다. ‘짝짜꿍’의 노랫말 중 “엄마 한숨은 잠자고 / 아빠 주름살 펴져라”를 보면 슬픔에 잠겨있던 당시 어른들의 마음을 어린이가 달래주는 듯하다.

양정고보 시절 춘원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신문에 윤석중의 시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신문에 윤석중(尹石重)이라는 이름이 ‘윤석동(尹石童)’으로 잘못 나왔다. 이를 보고 춘원은 ‘석동(石童)’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고 했다. 그래서 ‘석동’은 윤석중의 아호가 되었다. 또한, 춘원은 후에 「윤석중 동요집」 머리말에 윤석중을 ‘아기 노래 시인의 거벽’이라 칭찬했다.

“석동 윤석중군은 조선 아기 노래 시인의 거벽이다. 그의 노래 중에는 전 조선 아기네의 입에 오른 것이 여러 편이다. 그는 지금 이십이 넘은 청년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4~5세로부터 12~13세에 이르는 아기네의 마음과 뜻을 겸하여 가졌다. 이른바 ‘동심’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에게 백발이 오고 이가 다 빠져서 꼬부랑 늙은이가 될 때까지 이 ‘어린 맘’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춘원의 말대로 윤석중은 아흔 살이 넘어서도 ‘어린 맘’으로 동요를 창작했다.



유학길에 올라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양정고보 졸업반이었던 윤석중은 그 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다. 양정고보에서 호응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졸업장을 받는 것이 마음에 가책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쓰고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스물여덟 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조선일보사 사장이 윤석중에게 학비를 대주며 일본에서 신문학(新聞學)을 배워오라고 한 것이었다. 윤석중은 당시 편집을 맡고 있던 잡지 ‘소년’에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남기고 떠났다.

“들입다 퍼 쓰기만 한 나의 지식의 우물은 마침내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물이 나지 않는 우물은 메워버리거나 더 깊이 파야 합니다. 나는 마침내 더 깊이 파기로 하고, 일손을 멈추고서 유학의 길을 떠납니다.”



<계속>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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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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