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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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비움 속에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현존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8. 루돌프 슈바르츠의 ‘그리스도의 몸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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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몸 성당 내부, 아헨. 출처=Klaus Kinold

 

 
▲ 그리스도의 몸 성당 포털. 출처=Wikimedia Commons

 

 

 

 


아헨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 성당(Fronleich-namskirche, Corpus Christi Church, 1930년)’. ‘Fron’는 ‘주님’, Leichnam은 ‘몸’이라는 뜻으로, 20세기 최고의 교회 건축가 루돌프 슈바르츠(Rudolf Schwarz)가 설계한 첫 번째 성당이다. 이 건물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기하학적 입체의 내부를 온통 새하얗게 지은 성당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지어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건물을 가장 근대적인 근대건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성당이 어디 있나요?

유명하다고는 하나 오늘날 우리도 이 성당을 바라보며 “무슨 성당이 뭐 이래. 참 허한 성당이네”하고 비난할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비평가들은 이 성당의 공간이 공허하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럴 정도이니 당시에는 얼마나 급진적이며 획기적인 건물로 비췄을까? 그러나 그들을 향해 “이것은 공허가 아녜요. 침묵이에요! 그 고요함 속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라고 옹호한 사제가 있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전례 운동의 선구자인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였다.

저 새하얀 성당의 공간이 왜 ‘공허’가 아니고 ‘침묵’인가? 무엇을 위해 비웠으며 누구의 침묵이라는 말인가? 건축가는 빛이 가득 차 있는 비어 있는 저 단순한 공간은 가톨릭 신앙이 집약된 “거룩한 비움(sacred emptiness)”이라며, “여기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고요한 현존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당시 모더니즘의 공허와는 전혀 달랐다.

낮은 박공지붕을 얹은 하얀 입체가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의 도로에 면하며 서 있다. 정면에는 정사각형 창 두 개와 낮고 작은 문만 있다. 이 건물이 성당임을 말해 주는 것은 오직 문 위에 붙인 아주 작은 십자가 하나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독일 모더니즘 소설가 알프레드 되블린(Alfred Dblin)이 이 성당을 찾아와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니, 성당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죠?”라고 물었다는 말이 유명해졌다. 그럴 정도로 이 성당 건물은 익명적이다.



극도로 억제된 침묵의 공간

정면의 포털은 특별한 경우에만 열리므로 대부분 측면의 문으로 출입한다. 이 문을 들어오면 두 개의 유리문이 있는데, 앞에 있는 유리창과 문을 통해서는 좁고 낮은 어두운 측랑(側廊)이 보인다. 그 뒤로 검은 바닥 위에 온통 하얗고 밝은 회중석 중랑(中廊)과 제단의 벽이 나타난다. 이 두 공간을 나누는 것은 하얀 강론대가 붙어 있는 폭 4m의 검은 대리석 벽기둥뿐이다.

그런데 회중석 중랑에 들어서면 숨이 멎는 듯하다. 높고 텅 비어 있고, 있는 것이라고는 수직과 수평, 하얀 벽, 극히 단순한 정사각형의 창뿐이다. 장식은 전혀 없고 형태와 색채는 극도로 억제되어 있다. 14처도 오른쪽 낮은 측랑 벽에 두었다. 중랑에 있는 것은 제대 뒤의 벽, 좌우의 벽, 천장도 모두 비어 있는 순백의 공간 그리고 빛뿐이다. 게다가 비어 있는 성당은 높이 19m나 되는데, 30㎝밖에 안 되는 십자고상이 제대의 감실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저 작은 십자고상은 공간 전체를 충분히 지배하고 있다.

사진으로나마 제단의 벽을 잠시 주시해 보자. 제단을 바라보면 북서쪽의 왼쪽 벽 위에는 정사각형 창문 8개가 있고, 길에 면한 남동쪽의 오른쪽 벽면 위로는 5개가 있다. 제단 오른쪽 벽에는 창이 없으나, 왼쪽 벽에는 위아래 두 열로 6개의 창으로 들어온 빛이 제단을 밝게 비춰준다. 벽은 벽이 아니다. 그것은 제대가 어렴풋이 보이는 빛의 베일이다. 안으로 들어와 벽을 응시하면 중랑은 점점 더 초현실적으로 변한다. 창을 통한 역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벽을 주목하는 순간 그 베일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린다.

고딕 대성당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토록 하얗게 비어 있기만한 성당이 과연 성당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고딕 대성당에만 찬연한 빛이 있는 게 아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 성당’에는 빛의 입자와 돌의 입자가 얽혀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벽과 공간과 빛이 합쳐 있다. 천장에는 전선 한 줄에 12개의 등이 달린 조명등이 왼쪽에 7개, 오른쪽에는 3개 매달려 있다. 슈바르츠는 이 등을 켜면 조명등이 달린 전선은 공간을 높이 받치는 빛의 기둥이 된다고 했다. 이렇듯 빛은 공간을 형성하는 재료다.

하얗게 칠해진 순수한 벽과 천장과는 달리 회중석 바닥은 어두운 블루스톤이고, 의자도 바닥처럼 검다. 그러나 제단의 계단과 바닥은 회중석과 색조를 같게 하면서도 나무르에서 가져온 검은 대리석으로 회중석과 구분했다. 이로써 백성과 주님은 ‘땅’인 검은 바닥 위에 함께 있고, ‘땅에서 솟아오른’ 흰 벽으로 함께 둘러싸여 있다.

 

 

 

 

 
▲ 그리스도의 몸 성당 회중석. 출처=Wikimedia Commons

 

 


근대 가톨릭 성당 건축의 정점

루돌프 슈바르츠는 이 땅의 어떤 장소에 예배의 풍경을 구성하려면 성당은 세 영역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첫째가 이 세상의 회중석인데 순수하게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다. 이 영역에서 성령께서 실제로 움직이신다. 두 번째는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문지방 곧 제대다. 세 번째는 그 자체로 열려 있으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상의 영역,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말이 아니고는 그 신비를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모든 것이 넘쳐나는 성부의 영역이다. 이렇게 하여 제대 앞에 모인 백성과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으로 구분되고, 그러면서 동시에 두 영역은 서로에게 열려 있다. 이 땅의 기도는 문지방을 가로지르고, 하느님께서는 저쪽에서 사람에게 응답하신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바치므로, 교회의 기도는 ‘그리스도 중심(Christocentric)’이 아니라고 지적했고, 루돌프 슈바르츠도 ‘그리스도 중심’의 성당은 진리의 절반만을 표현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슈바르츠는 성당 건축은 삼위일체적이어야 하므로 제대는 중심이되 열린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몸 성당’의 제대 뒤에 있는 커다란 흰 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부 하느님을 나타낸다. 따라서 제대는 침묵을 응축한 벽을 향해 열려 있다. 그는 “거룩한 비움”은 언제나 하느님 신비의 “찬란한 풍요로움(resplendent abundance)”과 같다고 말했다.

과르디니가 이 성당의 공간을 ‘공허’가 아니고 ‘침묵’이라고 옹호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성당은 거룩한 현존의 집이다. …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시다. 그리고 이 벽의 고요함으로부터 하느님의 현존이 피어남을 알아차린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한 인간은 비어 있음에 열려 있게 되면 그는 신비로운 현존 안에서 감지할 것이다. 그것은 형상과 개념을 넘어 거룩하심이 비어 있음을 나타낸다.”

누구나 르 코르뷔제의 롱샹 경당이 최고의 근대 성당의 걸작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많이 말한다. 그러나 근대 가톨릭 성당 건축의 정점은 루돌프 슈바르츠가 설계한 아헨의 ‘그리스도의 몸 성당’과 후에 다룰 성 안나 성당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전례와 공간이라는 점에서 판단하는 이상, 롱샹 경당은 이 두 성당과 비교될 수 없다.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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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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