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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넘어 늦깎이 신자가 된 장우성 화백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9) 장우성 요셉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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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우성 작 ‘한국의 성모자와 순교복자’.



아흔이 넘은 장우성(요셉, 張遇聖, 1912~2005)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성당까지 가기엔 거동이 불편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삼청동 자택으로 찾아갔다. 장우성은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장우성이 가톨릭 신자가 된 배경에는 서울대 미대 동료 교수이며 학장이었던 장발 루도비코의 권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가톨릭 신자였던 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장우성은 “마음에서는 오래전부터 성화를 그리며 하느님과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더욱 깊이 있는 삶을 살게 돼 기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 김수환 추기경이 장우성 화백에게 세례를 주며 축성 성유로 이마에 십자 성호를 새기고 있다.




교황이 아끼던 병풍화

장우성이 가톨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매우 오래됐다. 그는 1949년 교황청이 주관한 ‘국제성화 미술전’에 한국 대표로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 3부작 성화를 출품했다. 많은 공을 들여 완성한 작품이었다. 출품은 장발 루도비코 학장과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3부작 중 가운데 그림은 한복 입은 성모님이 한 손으로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린 요한 세례자의 손을 잡은 다정한 모습이고, 왼쪽 그림은 한국의 여성 순교자 3인(강완숙 골룸바, 김효임 골룸바, 김효숙 아녜스), 오른쪽 그림은 한국의 남성 순교자 3인(남종삼 요한, 김대건 안드레아, 유대철 베드로)의 모습이다.

‘한국의 성모와 순교 복자’를 계기로 장우성은 한국적인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신부는 “장우성은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한국 교회 미술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살린 작품을 선보이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하고, 예술을 통해 신앙을 전한 인물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장우성은 비오 12세 교황의 팔십 세 송수축하(頌壽祝賀) 병풍화를 그렸다. 병풍화는 비단과 은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 바티칸으로 보냈다.

장우성은 교황의 반응이 궁금했다. 병풍화를 바티칸으로 보낸 한참 후에야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노 대주교는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왔다며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했다. 교황께서 “한국에 돌아가면 병풍화를 그려준 화가를 만나 ‘그림이 마음에 들어 침대 옆에 펴놓고 늘 보고 있다’고 꼭 전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말을 전해 들은 장우성은 무척이나 기뻤다.

또한, 장우성은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최한 ‘성화 전람회’에 ‘성모자상’을 출품했고, 성 라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가 주최한 ‘노약자·불구자·나환자 양로원 건립기금 마련 도서화전(陶書畵展)’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포기 모르는 화가

장우성의 조상은 대대로 한학자였다. 집에는 한문 서적이 수천 권이나 쌓여있었다. 위로는 누이가 네 명이 있었고 장우성은 다섯 번째 맏아들로 태어났다.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부친은 무척이나 엄했다. 부친 앞에만 서면 두 다리가 벌벌 떨렸을 정도였다. 그러한 부친 앞에서 재롱 한 번 부려본 적이 없었다. 부친은 배일사상이 무척 강했다. 일제의 단발령에 저항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그런 사상을 가졌기에 자식들을 일본인이 지은 신식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집에서 한학을 가르치며 한학자가 되길 원했다.

장우성은 다섯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한문 공부만 했다. 그때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을 다 떼었다. 그런데 장우성은 한문보다는 서화에 관심이 많았다. 사군자나 노안(蘆雁)을 그린 문인화가 그렇게 좋았다. 그림이나 글씨를 보면 그대로 따라 쓰고 그렸다. 한 번은 미인도를 그렸는데 사람들은 똑같이 그린 것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부친은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옛날에 어떤 지관이 “몇십 년 뒤에 이 집안에서 유명한 서화가가 나올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결국, 한문 공부를 병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림 공부를 허락했다. 열여덟 살에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한학은 당시 최고 한학자인 위당 정인보에게 배웠다. 그림은 당대 최고 화가인 이당 김은호에게 배웠다. 이당 화숙에는 평생 친구로 지냈던 운보 김기창이 있었다. 글씨 역시 최고 서예가인 성당 김돈희에게 배웠다.

그림 공부한 지 1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초입선했다. 그다음 해에는 ‘서화협회전’에서 글씨로 입선했다. ‘선전’과 ‘협전’ 두 곳에서 글씨와 그림으로 나란히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선전’에 초입선한 작품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 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를 그린 대작 ‘해빈소견(海濱所見)’이었다. 장우성은 갈매기를 본 적이 없었다. 갈매기를 그리기 위해 창경원 동물원을 찾아갔다. 손끝이 얼어붙는 엄동설한에 갈매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스케치했다. 장우성은 부친을 닮아 뭐든지 하나를 붙들면 포기하지 않았다.

장우성이 ‘월전(月田)’이란 아호를 쓰게 된 까닭이 있다. 하루는 부친이 장우성의 작품에 찍힌 낙관을 보고는 신통치 못하니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했다. 그러면서 ‘월전(月田)’이란 호를 내려주었다. 부친은 “달(月)은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비춰 주는 광명을 가졌고, 그 빛은 정감에 넘쳐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반갑기에 좋고, 밭(田)은 펼쳐진 넓은 들녘이며, 우리 마을 이름인 ‘絲田’(사전)에도 ‘田’이 들어있으니 달(月)과 밭(田)을 함께 쓰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장우성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달을 좋아했다. 달빛이 흘러내리는 뒷산 봉우리를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바라보기가 일쑤였고, 달 밝은 밤이면 비단옷을 입고 거닐거나 숲 속이나 시골 길을 혼자서 걷곤 했다. 작품도 달을 소재로 많이 그렸으며, ‘명월전신(明月前身)’이란 인장도 새겨 사용할 정도로 달을 사랑했다.



마음으로 우주를 그리는 사람

장우성은 ‘그림이라고 다 예술품일 수 없고, 화가라고 다 예술가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화가란 ‘마음으로 우주를 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예술은 손끝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과 교양과 수련을 토대로 한 정신의 표상’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술가란 기술공이 아니고 원숙한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양과 철학이 쌓여야 비로소 참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말이 있다. 바로 ‘회사후소(繪事後素)’이다. 장우성은 이 말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뜻은 ‘그림 그리는 일은 맑고 깨끗한 정신적 바탕이 있은 후에 한다’로 「논어」에 들어있는 말이다. 장우성은 그림에서 정신이 무척 중요하다고 하며 자신의 예술철학을 밝혔다.

“동양화는 붓을 들기 이전에 정신의 자세가 중요하다. 물체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내면을 관조하여 자기의 심상을 표현한다. 선은 함축을 지닌 점의 연장이다. 그리고 공간은 백지가 아닌 여운의 세계다. 먹빛 속에는 요약된 많은 색채가 압축되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테두리 밖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장우성은 꽃이나 새 등의 자연을 많이 그렸다. 젊었을 때는 인물화를 그렸으나 사람의 얼굴은 세월에 따라 복잡하게 변해 염증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라 자연을 많이 그렸다. 그가 즐겨 그린 새는 학, 백로, 까마귀였다. 학은 가장 좋아했던 새로, 몸이 희고 머리에 단정(丹頂)이 곱고 자리가 훤칠하여 외모가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주변 사람들이 장우성의 모습이 학과 닮았다고 해서 더욱 좋아했다. 장우성은 세속을 벗어난 고귀한 경지와 상서로운 기분을 표현할 때 학을 그렸다. 그리고 백로는 몸 전체가 순백이고 형태와 성격이 학과 비슷해서 좋아했다. 또한, 까마귀는 예부터 흉한 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렸다. 이유는 까마귀가 흉한 일을 경계하라고 예고하는 길조(吉鳥)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속>





백형찬(라이문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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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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