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건(레오, 32)씨가 운동장에서 아무 곳을 향해 축구공을 찼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공이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아들의 인생 첫 골을 지켜본 엄마 박순옥(보나, 인천 소사3동본당)씨는 “세상 어느 곳에 골대가 움직이는 축구 경기가 있겠느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장애인거주시설(이하 시설)에서 함께 지내는 사회복지사들이 학건씨를 비롯한 발달장애인 거주자들을 배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사실 시설에 들어가기 전 학건씨는 늘 심심해했다. 잘 먹지 않는 것 외에는 부모 속을 썩이는 일이 없었지만, 말이 없고 함께 놀지도 않았다. “우리 학건이는 가만히 있어서 더 애가 탔어요. 그런데 우리 아들을 위해주는 분들이 계신 시설에서 축구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전보다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해주시니,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학건씨 부모도 20여 년 전 아들을 위한 시설들을 백방으로 알아봤다. 어떤 환경이 더 나을지 아무리 찾아봐도 당시 시설들은 매우 열악했다. 박씨는 “과거에 비해 장애인 관련 시설들도 많이 개선된 것 같다”고 했다. 자녀에게 더 나은 환경을 주기 위한 부모의 오랜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학건씨가 사는 지금의 시설에서도 부모들이 운영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오스트리아가 장애인 복지 선진국이 된 배경에도 부모가 있었다. 카리타스 비엔나의 한스 드 베츠 사회복지사는 9일 국회에서 자국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는 장애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며 과거 ‘장애인의 삶은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오스트리아의 안타까운 역사적 배경을 언급했다. 오스트리아의 장애인 부모들은 이를 개선하고자 직접 거주시설을 짓는 데에 팔을 걷어붙였고, 협회를 설립해 사회적 공감도 이끌어냈다. 이후 정부 주도 ‘탈병원화 운동’이 시작돼 관련 법안이 제정되는 등 복지 선진국의 기반이 마련됐다.
의정부교구 조이빌리지
종이 대신 휴지를 좋아하면 휴지를
우리나라에도 부모의 마음으로 지은 시설이 있다. 국내 최초 장애인에게 1인 1실을 제공 중인 의정부교구 시설 ‘조이빌리지’다. 이곳은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기도 모임 ‘기쁨터 가족공동체’에서 출발했다. 조이빌리지 김미경(루치아) 원장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엄마다.
경기 파주시 나무가 우거진 둘레길을 따라가다 보면 조이빌리지의 입구가 드러난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작은 건물들이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시설이라기보다, 아담한 마을을 연상케하는 곳이다.
내부는 더 눈길을 끈다. 6인 생활실은 커다란 공용 거실을 중심으로 장애인 편의시설이 완비된 공용 화장실 2개와 주방, 개인방 등으로 이뤄졌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이곳에 사는 서영씨는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 사용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말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등을 찾아 사회복지사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복지사들은 곧장 그가 보여주는 화면을 보고 대화를 이어간다.
공용 식탁에서 지선(안나)씨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왜 종이를 안 주시고 휴지를 주시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사회복지사가 웃으며 말했다. “지선씨는 종이 줘도 안 그려요. 휴지 위에만 그려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이들 안에 살아가고 있기에 지선씨의 얼굴에도 평화로움이 감돈다.
복도 곳곳에 밝혀진 양초 등은 발달장애인들이 만든 작품들이다. 지하 상설 갤러리에는 이들의 상상력이 그대로 표현된 그림들이 걸려 있다. 따스한 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그림의 작가인 범진(미카엘)씨는 개인전만 6차례 열었을 정도로 여느 화가 못지않은 실력을 가졌다.
자신의 재능을 익히고 가꿀 직업 훈련장도 있다. 여기서도 범진씨를 포함한 4명이 커피 머신을 이용해 먹고 싶은 음료를 만들고 있었다. 선영(시몬)씨가 말했다. “커피 만드는 게 재밌어요!” 교육을 통해 무언가라도 스스로 수행해낼 수 있는 이들은 지역사회로 나갈 준비를 한다.
김 원장은 24년 전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기도 모임(이하 기쁨터)에 나갔던 날을 떠올렸다. “당시엔 너무 절박해서 모인 거였어요. 모여서 울고불고 하소연하기도 하고, 워낙 마음이 힘드니까 집단 상담도 받았고요. 무엇보다 서로를 위해 기도를 해줬죠.” 이들은 2010년께 이미 현재 장애인 복지의 다양한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주간보호센터, 지역아동센터, 그룹홈을 만들었다. 여러 시도 끝에 결국 완성한 모델이 이곳 ‘조이빌리지’이다. 유럽 등 복지 선진국 사례들을 참고했다.
그는 시설장이 아닌 부모로서 진심 어린 당부를 건넸다. “발달장애인 중에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처럼 원하는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갈 수 있는 이들이 있어요. 반면 30년 넘게 교육을 해도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죠. 발달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으면 좋겠어요.”
보건복지부는 13일 “발달장애인 보호자 돌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긴급돌봄 시범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발달장애인의 보호자에게 입원, 경조사, 신체적·심리적 소진 등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발달장애인과 그 보호자에게 24시간 긴급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2027년까지 5년간 정부가 그려갈 장애인 정책의 청사진도 발표했다. 최중증 장애인에 대한 통합돌봄서비스와 장애인 보건의료체계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시설 거주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강화와 자립을 위한 로드맵을 보완해 2025년 본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신규 시설 설치를 금지하는 기조를 유지한다는 정부의 입장에 발달장애인과 그 부모의 걱정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유경촌 주교는 지난 9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 토론회에서 “정부는 어떤 장애인도 소외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며 “탈시설 로드맵은 이에 대한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정책과 제도를 정비해 장애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