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을 가다
가르멜회의 카리스마는 은수의 삶과 공동생활의 조화를 이루며 하루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와 노동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수도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가르멜 수도자들이 시간 전례를 하고 있는 모습.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제공
빛이 있는 곳에 향기가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빛 안에 사는 사람에겐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빛이신 주님을 위해 스스로 봉쇄 수도원에서 살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세상에 퍼뜨리는 봉쇄 맨발 가르멜 여자 수도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소망을 들어봤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사막에 핀 작은 꽃
서울에 사막이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갈릴래아 지방 가르멜 산 동굴에서 은수자로 생활하며 오로지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았던 엘리야 예언자와 그의 제자들을 본받아 서울 북한산 자락 봉쇄 수도원을 사막 삼아 숨어 사는 이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열정으로 불태우며 사는 수도자들이 있다.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이다. ‘주님 탄생 예고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가르멜 수도원’이다. 1939년 한국에 진출한 첫 번째 관상수도회이자 첫 가르멜 여자 수도회이다. 이곳에는 장엄서원자들과 수련소 수녀 등 30~80대까지 고루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서울 도심에는 봄꽃이 활짝 피었는데, 수도원의 봄은 새 생명을 머금은 꽃망울만 부풀린 채 담장 밖 멀리서 서성이고 있다. ‘봉쇄 수도원’ 하면 철저한 고독과 침묵,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 고행을 떠올리지만, 이는 편견이다. 세상과 물리적으로 봉쇄돼 있을 뿐, 존재가 격리돼 있는 것은 아니다. 숨어 사는 작은 꽃이지만, 무인도가 아닌 세상 속 주님의 뜨락에서 교회의 보석으로 빛나고 있다.
올해 탄생 150주년과 시복 100주년을 맞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나는 자모이신 교회 안에서 심장이 되겠습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성소와 가르멜의 삶을 표현했다.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참된 제자이며 딸인 가르멜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숨은 삶이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느 수도회와 구별되는 가르멜회의 독특한 카리스마는 ‘은수((隱修)의 삶’과 ‘공동생활’의 조화다. 고독과 공동체, 기도와 일, 작업실과 은둔소가 함께 있는 정원, 시간 전례 합송과 개별 묵상 등 ‘나와 공동체’가 늘 공존한다. 기도와 노동, 개인과 공동체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수도 공동체를 유지한다. 또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조화롭게 사는 집이라 해서 수도원을 ‘비둘기 집’이라고 한다.
기도, 끊임없이
가르멜회 수도자의 삶은 단순하다. 꽃이 빛과 이슬을 자양분으로 삼듯이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기도’와 ‘노동’으로 산다.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하고 기도 안에 깨어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 사는 게 이들의 일상이다. ‘기도’는 가르멜 수도자의 모든 것이다. 미사와 하루 7번의 시간 전례, 아침저녁 2시간의 묵상 및 관상 기도가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일과다. 이외 개인기도와 성체 조배,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느님 현존 수업을 통해 매 순간을 봉헌한다. 모든 가르멜 수도자들은 ‘기도의 달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수도자들은 “수도생활에서 강도 높게 다가오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요구”라고 말했다.
관상, 내적인 삶의 체험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관상(觀想)의 삶을 지향한다. 관상은 단순하고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는 인간 영혼의 능동성과 수동성 여부에 따라 관상 기도를 둘로 구분했다. 기도하는 이의 노력이나 은총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습득 관상’과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주입 관상’이다.
고 정진석 추기경은 “가르멜 수도회는 은수자로서 사도적인 삶 곧 순수 관상생활이면서도 교회가 요구하는 사도직을 담당하고 있다”며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내적인 삶의 체험은 현대의 많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노동, 개개인이 십자가가 되어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한가한 틈을 타서 영혼 안에 침입하려고 노리는 악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항상 무슨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일하라”(회규 17)는 수도 규칙에 따라 끊임없이 일한다.
서울 가르멜회 수도자의 주요 노동은 미사 성찬례에 사용할 ‘제병’을 만드는 일이다. 제병을 굽는 작업은 상상 이상으로 고되다. 밀가루 반죽뿐 아니라 제병기의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기도와 노동의 조화뿐만 아니라, 수도원 건축이나 전례, 생활 모든 면에서 영성생활의 스승이자 맨발 가르멜 창립자인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의 정신을 따라 ‘단순함과 기품’을 지향한다. 수도복은 물론 성당을 제외한 수도원에는 어떤 장식도 없다. 십자가조차 예수님의 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 수도자 개개인이 십자가에 달린다는 상징이다. 그래서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늘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산다.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은 1962년에 지은 벽돌집이다. 60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낡은 수도원은 안전 진단 결과 재건축 판장을 받아 하루 빨리 새로 지어야할 실정이다.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전경. 도재진 기자
꽃마음, 소망과 호소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은 지은 지 60년 된 벽돌집이다. 1962년 2층으로 지은 수도원은 철근 하나 없이 벽돌과 시멘트로 지어졌다. 노후가 심해 안전 진단을 한 건축가는 수도자들에게 “화덕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다”며 “지금 당장 불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1층과 2층 천장 두께는 50㎝. 어느 날 2층 다락에서 석면 제거 작업을 하던 전기공의 한쪽 다리가 쑥 빠져 바닥을 뚫고 나와 마침 아래층에서 영적 독서를 하던 수녀가 깜짝 놀라기도 했단다. 벽에 못을 박거나 벽을 뚫을 수도 없다.
성당 내 수도자들의 기도 공간에는 난방이 거의 안 돼 수도자들이 매일 추위에 고생한다. 찬 바닥에 2시간 넘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니 새벽부터 꽁꽁 언 다리로 하루를 보낸다. 배관은 시도때도없이 터지기 일쑤다. 한겨울에는 배관이 터질까 봐 하루 두 시간만 보일러를 켰던 때도 있었다.
30년 전 수도원을 방문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집이 이래서 어찌 사노”라고 걱정하자, 수도자들이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는 시원해서 괜찮다”고 답했다고 한다. 수도자들은 “더위 때문에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면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실까 봐 땀을 닦을 때도 하느님께서 못 보시도록 얼른 닦는다”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수도원 건물 실상이 어떤지 사진이라도 찍어 보여달라는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수도자들은 “저희보다 더 힘들고 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저히…”라며 마다했다. 수도원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가르멜 여자 수도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으로 소담스럽게 핀 교회 영성의 꽃들이다. 예수의 대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예수 성심의 데레사 마르가리타, 로스 안데스의 예수의 데레사, 에디트 슈타인으로 더 알려진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등이 성인품에 올랐고, 현재 100여 명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시복시성 안건으로 올라와 총회에서 준비하고 있다. 서울 가르멜회에서도 창립자 성체의 마리 메히틸드 수녀와 제2대 원장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가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로 선정돼 시복 청원 중이다.
침묵으로 왔다가 침묵 속에 가는 것이 꽃이다. 향기가 그윽한 꽃에 사람들은 머리를 깊이 숙일 때가 있다. 꽃이 뿌리내린 자리가 너무도 거룩하고 고결하기 때문이다. 가르멜회 수도자들이 그런 꽃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가르멜의 작은 꽃들이 새롭게 조성된 주님의 뜨락에서 더욱 소담스럽게 필 수 있도록 많은 은인이 거름이 되어주길 소망하고 있다.
후원 계좌 : 국민은행 354601-04-171266, 예금주 : (재)천주교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회, 문의 : 02-902-1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