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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16) 타인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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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100일 된 아들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녀는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남편에게 폭행당해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었고 매번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 남편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설 명절 끝에 친정집에서 어린 아들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습니다.

온종일 그 기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상담했었던 자살 시도자 중에 자녀 살해를 계획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들은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책임감이 매우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상대편 배우자는 다양한 이유(과중 채무, 가출, 이혼, 건강상 문제, 폭력, 부재 등)로 부모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부분 열악한 상황에서 혼자 양쪽 부모 역할을 하고 경제활동도 홀로 감당하면서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가족 내 불화가 더 심각해지고 경제적 어려움도 한계상황에 다다르게 되면서 이들의 심리적 불안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외부의 도움이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결핍된 자녀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삶의 공포와 절망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오랜 망설임 끝에 자신의 상황을 누군가에게 표현했으나 거절당하면서 억눌러왔던 모든 것이 역류하고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너무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완벽에 가까운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타인은 이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이렇듯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겪는 고통이 심해지면서 그 고통이 아이들에게 전이되고 그런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외부의 부정적 시선(일종의 투사. 자신이 느끼는 대로 타인도 본다고 믿음)을 부모인 자신이 내면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쩌면 ‘자녀 살해 후 자살’은 상대방 배우자에 대한 원망, 분노, 적대감, 심지어 살해 충동을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으나 이를 억압한 채 자신과 아이를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묶고 온전히 자신만이 아이를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에만 몰입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아이와 관련하여 그 누구도 이들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생존을 전제로 한 것이지 죽음까지 사고를 연장하는 것(아이 혼자 세상에서 겪을 어려움을 선[先] 체험하고 미리 차단하려는)은 정말 무서운 역동을 만듭니다.

또한 이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완벽주의적 성향은 자신의 불행한 상황(자신의 인생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을 일종의 흠결로 인식하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사회적 노출을 극도로 꺼리게 만듭니다. 그래야 그나마 자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영역에 존재할 수 있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한 순간(더 이상 흠결을 덮을 수 없는 순간), 비극을 실행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이 그러한 죽음을 생각하기 이전의 시간 동안, 그 숱한 좌절과 고통의 시간 동안, 그저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어려움은 가족 외의 공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무책임 때문입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견고한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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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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