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못 가지 않나요?”
“장례미사는 가능한가요?”
‘가자(가톨릭 자살예방교육) 생명으로!’를 하다보면 가끔씩 나오는 질문들입니다. 아무래도 구원에 대한 질문은 신자들에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몇몇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데, 이 문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 짐작을 해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살이라는 주제를 가톨릭 안에서 다루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하십니다. 교리에서 이미 정해진 내용인데 새롭게 다룰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자살한 사람들은 죄인이고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생각은 우리 안에 뿌리 깊은 두려움입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당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은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는, 심판만이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정말로 그들이 받을 것이 심판 밖에 없었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의거해 현행범으로 잡혀 온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정의와 자비를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하느님에게 달려있는 것이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자살자를 대하는 태도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돌아가신 분을 위해 공동체는 기도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를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이해를 아득히 넘어서 계십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몫이고, 우리의 몫은 자비로운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변 사람들을 돌봐야 합니다. 사고나 병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분들도 그 상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살유가족들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아픔이라는 복합적인 비애를 겪게 됩니다. 이들과 함께 있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은 공동체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이지 고통스러운 이에게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셋째, 또 다른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루카 5,31)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찾을 힘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마치 숨어있는 것처럼 만나기도 힘듭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어려운 사람들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공동체 안에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서는 1983년도에 새 교회법전이 나오면서 자살자에게 장례미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주변에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