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가 아니었으면 성당 근처에 갈 일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는 그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를 따라 성당에 가서 ‘미사’가 뭔지, ‘신부님’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 그리고 그를 위한 ‘빛이 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시각장애인의 수호성인 ‘루치아’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 말대로 “사랑에 눈이 멀어” 종교를 선택했고, 그를 택했다. 김유진(루치아, 35, 서울 노원본당)ㆍ김필우(필립보, 41)씨 부부 이야기다. 이들은 스스로 “지극히 평범한 부부이고, 가정”이라고 했지만, 서로를 위하며 사는 마음만큼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가정의 달 5월의 끝자락, 평범하지만 특별한 부부를 만났다.
평범하다기에는 특별한 이야기
부부는 같은 특수학교 동료 교사였다. 유진씨는 대학교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했고, 교내 시각장애인 친목 동아리에서도 활동했기에, 앞이 보이지 않는 필우씨가 그리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저 동료였고 오빠였다. 여느 연인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호감을 느끼다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다. “고향이 경상도인 제게 서울 사람인 오빠의 부드러운 말투와 매너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하하.”
하지만 그들의 연애가 마냥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실수로 여자화장실에 들어가 난감할 뻔했던 상황,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지만, 미처 다 지워지지 않았던 휴대폰 속 전 여자 친구의 사진, 사람 많은 곳에서 유진씨를 놓쳐 다른 사람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던 일 등 앞이 보이지 않아 일어난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무궁무진하다.
결혼 후 필우씨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서 더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아이가 열이 났지만, 해열제를 빨리 못 찾았어요. 빨간약도 구분 못 했죠. 그때는 정말 미안하더라고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선 음성 지원 어플이 설치된 휴대폰이 필요하다. 이제 6살 된 아들은 아빠를 위해 책과 함께 꼭 휴대폰을 가져온다. 한참 예쁜 짓을 할 3살 된 딸도 머리에 꽂은 핀을 자랑하기 위해 아빠 손을 자기 머리에 가져다 대준다. 아이들은 벌써 아빠와 아름답게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시각장애인 아빠는 특별한 존재가 아닌, 그저 “우리 아빠”다.
유진씨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교육할 때 ‘장애인이니까 배려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우리 아이들은 삶 자체가 교육의 장”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모든 일상을 걱정하진 마시라. 남편 필우씨는 한 번도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없을 만큼 꼼꼼하다. 오히려 아내가 실수로 물건을 빠뜨리면 챙겨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단다. 청소할 땐 영락없는 여느 남편들과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청소를 못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좀더 깨끗하게 못하냐고 아내에게 잔소리 들을 때도 많아요. 본의 아니게 대충하다 들킨 거죠. 더 잘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이들은 특별함 속에 지극한 평범함으로 삶을 그리고 있다.
루치아, 시각장애인의 수호성인
아내 유진씨에겐 본래 종교가 없었다. 신자인 남편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정확히는 쉬는 교우였던 남편에게 먼저 성당을 가자고 한 것이 아내였다. “나, 오빠 따라 성당에 가볼래.” 유진씨는 “솔직히 신앙 자체보다, 연애 시절 남편과 주일에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성당을 찾았다”며 “남편은 6개월간 교리교육에 늘 함께해줬다”고 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입교한 셈이죠.” 사랑은 때로 이처럼 같은 믿음을 향하게 한다.
세례명을 루치아로 한 것도 특별하다. 루치아는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눈알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다시 돌려받아 볼 수 있게 된 성인이다. 이 때문에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다. 루치아라는 이름도 빛을 의미하는 ‘룩스’(Lux)에서 유래했다. “남편에게 빛이 돼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필우씨는 “아내가 세례명을 루치아로 정할 때 결혼을 결심했다”고 웃음 지었다. 휴대폰의 아내 이름은 ‘사랑빛’이다. 부부가 나란히 끼고 있는 묵주 반지는 서로가 서로의 빛이 돼주고 있음을 조용히 대변하고 있었다.
필우씨는 “어릴 때부터 막연하지만, 성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도 꿨는데, 아내 덕분에 다시 성당을 나가게 됐다”며 속에 있던 고마움을 다시금 표했다. 어느덧 첫째도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이 시끌벅적 바람 잘 날 없지만, 조금씩 제가 꿈꾸던 성가정의 모습이 돼가고 있는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부부의 발자국
“우리의 발자국이 누군가의 길잡이가 됐으면 합니다.”
유진씨는 현재 누구나 작가처럼 글을 연재하는 온라인 공간인 ‘브런치스토리’에서 필명 ‘루시아’로 부부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 시각장애가 있는 남편과 사니 각종 세금 면제 혜택부터 집이 좀 지저분해도 괜찮고, 화장 안 해도 예쁘다고 해주는 데다, ‘장애인과 결혼해서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고 산다니! 이처럼 유쾌하면서도 담담히 써내려간 그녀의 일상 기록들이 읽는 이들에게 잔잔하고도 특별한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다.
유진씨는 “저희 모습은 결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고 했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주변에 저희와 같은 모습의 가정이 꽤 많이 있습니다. 우리끼리 모이면 누구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느 순간 장애인의 날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안쓰러운 모습만 조명되고, 사회적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선들 탓이다. 남편 역시 모든 사람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듯, 앞이 보이지 않는 불편함 또한 그런 차원이라고 했다.
“장애를 극복하고 역경을 이겨냈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분명 주변 도움은 필요합니다. 불편한 것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죠. 그 외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상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지, 사람에 대한 동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 곳에나 세워놓은 전동 킥보드와 자전거, 맥락 없이 끊겨 버리는 길 위의 점자블록 등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부분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조금만 신경 쓰면 나아질 수 있거든요. 이런 면에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꿉니다.”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 또 다른 이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었다. “주어진 하루하루 치열하게 사는 거죠. 그러다 보면 훗날 우리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 오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요. 일상 안에서, 신앙 안에서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부부는 다시 두 손을 잡고 앞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