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치마와 자켓, 오른쪽 가슴에 달린 붉은색 장미. 순교자의 거룩한 피를 형상화한 복자여자고등학교 교복은 멀리서도 어느 학교 학생인지 알 정도로 눈에 띈다. 이목을 끄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천안 지역에서 ‘복자여·중고 출신’이라는 배경은 자연스럽게 ‘인성이 바른 사람’으로 연결된다. 지성뿐 아니라 인성에 방점을 둔 복자여자중·고등학교의 교육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인재를 62년간 배출하고 있다. 집단따돌림과 교권추락 등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교육현장을 되살릴 수 있는 해답을 복자여자중·고등학교(교장 곽정아 소화데레사 수녀) 교육에서 찾아본다.
■ 순교자 영성서 비롯된 교육이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공동창설자인 윤병현(안드레아) 수녀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61년 중학교, 1963년 고등학교를 차례로 개교했다. 복자여중·고는 ‘참된 진리를 추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여성 양성’이라는 교육이념을 60여 년간 따르고 있다.
신앙과 사랑을 위해 생명을 바친 한국 순교자들을 주보로 모시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영성을 교육현장으로 가져온 복자여중·고는 참 행복과 참 진리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을 지향한다.
복자여중·고 교장 곽정아 수녀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의 용기는 가치관이 혼란해질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며 “하느님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이 보여준 사랑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경험하고 배웠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뜻을 반영해 복자여중·고가 내세운 교육목표의 첫 번째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또한 기본을 갖춘 예의 바른 사람, 꿈을 키워가는 실력 있는 사람,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양성하고자 힘쓰고 있다.
‘참된 진리를 추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여성’이라는 복자여중고의 교육이념은,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가치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뿌듯함,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기쁨을 알고 있는 복자여중·고 학생들의 행복한 표정은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일깨워주고 있다.
■ 참된 진리를 찾는 길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복자여중·고가 선택한 교육은 독서다. 중·고등학교가 대학진학을 위해 성적을 내는 학원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움터가 돼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 독서지도시범학교로 지정되기도 했던 복자여고는 선구적으로 독서교육을 진행해 왔다. 1학년은 지정도서 중 한 권을 읽고 토론하는 ‘씨앗책 세미나’를, 2학년은 같은 진로를 꿈꾸는 학생들이 같은 책을 읽고 토론과 발표를 하는 독서모임 ‘책숲’을, 3학년은 희망 진로 분야와 관련된 책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전공독서 세미나 ‘숲길’을 운영하고 있다. 복자여중도 ‘책과의 대화로 자라나는 지혜와 생각의 열매’를 주제로 작가와의 만남, 문예대회, 인문학 기행 등 책과 관련된 창의적인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긍정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데 필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양성하고자 복자여중·고가 특별히 힘쓰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인성교육이다. 복자여중은 수업 안에서 자아탐색 뿐 아니라 더불어 살기, 다문화의 이해, 바른 언어 사용 등을 배운다. 복자여고는 인성교육뿐 아니라 봉사활동, 지역사회 나눔 활동, 생태환경 교육을 통해 타인과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고 있다.
복자여고 3학년 전홍미양은 “인성수업 가운데 친구의 장점을 찾아 칭찬을 해주는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며 “몰랐던 내 장점을 객관적으로 듣게 돼 좋았을 뿐 아니라 서로 칭찬하면서 친구들과 많이 가까워질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복자여중 3학년 정희지양은 “주변에 있는 것들에서 가치를 찾는 수업을 하면서 저는 떨어진 낙엽에서 가족의 가치를 찾게 됐다”라며 “붉게 물든 낙엽을 보면서 기쁠 때나 힘들 때 항상 곁에 있어 주는 가족을 떠올리며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사진을 보내드린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 세상의 빛·소금으로 ‘복자화’되는 학생들
점심시간이 한창인 12시10분, 복자여중·고 교문 초입 성모상 앞에 모인 스무 명가량의 학생들이 서 있다. 손에는 묵주와 기도서가 들려 있다. 5월 한 달간 점심시간에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학생들. 친구와 놀거나 쉬고 싶을 법한데, 성모송을 바치는 아이들의 눈빛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복자여중·고 학생들은 주님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8시30분부터 5분간 함께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보낸다. 선생님과 부모님이 쓴 편지, 학생 작가단이 쓴 따뜻한 일상 이야기, 생태환경 이야기 등 매일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듣고 묵상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에 5분, 짧은 시간이지만 ‘나’를 돌아보는 찰나의 순간이 모여 내면을 단단히 다지고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다는 게 학생들의 설명이다.
전홍미양은 “아침마다 차분하게 눈을 감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니 공부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나 예민함이 줄어들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복자여고 3학년 원소연(로사리아)양은 “학교에서 4월에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5월에는 묵주기도를 1단씩 바친다”라며 “분주한 하루 속에서 친구들, 수녀님과 같이 기도를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니 오후 시간을 더욱 알차게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복자여중·고에서는 ‘복자화(化)’라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 입학할 때 다소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졌던 학생들도 3학년이 되면 차분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갖춘다는 것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상심한 학생에게 “공부도 중요하지만 너의 존재가 더욱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교사가 있는 학교.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는 복자여중·고의 교육은 아이들이 참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곽정아 수녀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여러 지식과 경험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서 사랑의 가치를 배우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참된 사람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