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온 편지] 캄보디아에서 윤대호 신부 (5·끝)
윤대호 신부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있다.
윤 신부가 어린이날 행사를 마치고 썸롱톰성당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있다.
충분히 다가가기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포토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사진작가인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가 남긴 말이다. 그는 세계 곳곳의 전쟁터를 누비며 그 참상을 세상에 알려왔고, 카메라 두 대만 들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 들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늘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갔었고, 그렇게 생생한 전쟁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다가 결국 지뢰를 밟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선교의 전제 조건
오늘날 선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아주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웃들을 교회로 직접 초대하는 것부터, NGO 활동처럼 사회사업을 통해 이웃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증거하는 방식도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교회를 대중에게 계속적으로 노출시키면서, 함께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 또한 오늘날 많이 실행되고 있는 선교방식 중 하나이다. 사회 변화와 기술 발전에 따라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응, 적용하면서 교회의 선교활동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선교활동의 전제 조건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바로 하느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관계라는 전제조건 없이는 복음 선포도, 그리고 세례성사까지 이어지는 선교활동도 이뤄지기 어렵다. 로버트 카파의 말을 조금 인용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이웃에게 ‘충분히 다가가’ 관계를 맺어가는 것에서부터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해외 선교 사제의 역할은 바로 ‘충분히 다가가는’ 것이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이들의 곁에 다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고, 그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직간접적으로 소개하며, 그들이 주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와 같은 해외선교 사제들의 삶이다. 그리고 우리는 먼 곳에 있는 우리 이웃들에게 ‘충분히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고향과 가족, 친구들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윤 신부가 쫄츠남 명절을 맞아 캄보디아 전통에 따라 어르신들의 손을 씻겨주고 있다.
윤 신부가 첫 번째 사목지로 발령을 받고 이삿짐을 싸서 차로 떠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어떤 선교 사제로 살 것인가
현재 캄보디아에는 약 100여 명의 사제가 활동하고 있으며, 그중 90여 명은 해외에서 캄보디아로 파견된 선교 사제와 수도 사제들이다.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태국, 인도, 미얀마 등 여러 나라에서 모인 우리 캄보디아의 사제들은, 캄보디아 교회를 위해, 그리고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캄보디아의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들 곁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캄보디아의 언어를 배우고, 캄보디아의 문화를 익히며, 그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선교 사제로 양성되는 9년의 과정. 사실 나는 그 기간을 ‘어떤 선교 사제로 살 것인가’에 대한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보내왔다. 그러나 막상 사제품을 받고 선교지에 파견되었을 때, 그동안 스스로 내렸던 정의와 정답은 모두 잊게 되었다. 열정 가득한 새 신부인데 별다른 일 없이 그저 현지 적응과 언어 공부로 보내는 시간들은 너무나도 무료했고, 일도 없는데 늘 기운도 없었다.
처음 사목지 발령을 받고 나서 기쁜 것도 잠시, 한동안은 업무를 익히느라 정신없었고, 그 이후로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또 정신없이 살아갔다. 다른 선교지의 상황은 모르겠지만, 일단 캄보디아 천주교회는 아직 갖춰진 것보다 갖춰야 할 것들이 훨씬 많다. 따라서 일을 만들지 않으면 별로 일이 없겠지만, 막상 일을 만들어 시작하면 수습하기 버거울 정도로 너무 많다. 문제는 내가 굳이 일을 만들어서 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런 상황을 즐긴다는 것이다. 덕분에 코로나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스스로 만든 일에 치이며, 그러면서도 나름대로는 재밌게 살아왔던 것 같다.
코로나로 모든 활동에 제약이 생겼을 때,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자문했던 ‘어떤 선교 사제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제대로 중간점검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내가 ‘관계’에 소홀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물론 교우들의 가정 방문과 면담을 소홀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목자라는 역할과 임무 때문에 이뤄진 관계였지, 내 삶으로써 맺은 관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일 중독처럼 일만 하다가 교우들과 맺는 관계마저 일처럼 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내 집 드나들듯 편안히 찾아가
과거 선교 사제에 대한 스스로의 자문(自問)에 대해, 나는 나의 수품 성구로 최종적인 자답(自答)을 했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라는 말씀인데, 당시 내가 되고 싶었던 선교 사제는 선교지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서 ‘함께’란, 어떠한 조건도 필요 없는 관계, 즉 가족 사이에서나 쓸 수 있는 ‘함께’의 개념이었다. 그리고 코로나라는 비극이 역설적으로 내게 만들어준 여유는, 내가 찾았던 그 답을 마음속에 각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도 더 많은 형제들과 만나고, 실없는 이야기부터 진지한 이야기까지 인간 대 인간으로 나누면서, 나는 그들의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갔고, 그들은 그런 나를 받아주었다. 언택트 시대에 더 많은 관계, 더 깊은 관계가 맺어진 것이니 이 또한 역설적이다.
물론 베트남계 교우촌에 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이제는 우리 교우들의 집도 그냥 내 집 드나들듯이 편하게 들어간다. 지나가다가 잠시 앉아 커피도 얻어 마시고, 쓸데없는 수다도 많이 떤다. 처음엔 교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내가 더 많이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편안한 관계 속에서 사목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도 더 많이 떠오르고 있고, 내가 찾지 못한 답을 교우들에게서 얻을 때도 많다.
요즘은 우리 교우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조금 더 어려운 캄보디아인 마을을 찾아가 함께 봉사 활동도 하고, 여러 나라에서 지원받은 물품들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생각보다 우리 베트남계 교우들과 캄보디아인 이웃들 사이에 친교도 잘 이뤄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혼자, 또는 수녀님들과 같이 다닐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든든하다. 나와 우리 교우들이 함께 모여 주변의 이웃들과 맺어가는 이 새로운 관계가, 그들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이어질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하느님께 용기를 청하며
선교 사제로 양성되는 9년의 과정, 그리고 선교사제가 된 지 9년 5개월…. 18년 5개월을 오직 ‘선교’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제서야 선교가 무엇인지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우리 이웃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한다.
그리고 5회에 걸쳐 글을 연재해주신 가톨릭평화신문과, 관심 가져 주시고 기도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후원 계좌 : 우리은행 1006-601-211961
예금주 : 재단법인 천주교 한국외방선교회
윤대호 (다니엘) 신부
한국외방선교회 캄보디아지부 프놈펜 대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