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찾아오는 7월이다. 휴가철의 시작을 알리는 이때, 한국 순교자들의 발자취와 얼이 서린 국내 성지로 발걸음 하면서 뜻깊은 여름을 나보자. 성지 순례로 우리의 신앙선조들을 만나고, 성지 인근에 새롭게 조성된 순례길을 걸으며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 자연 속에서 가만히 묵상에도 빠져보자. ‘성지와 순례길’ 시리즈를 3편 연재한다.
한국 교회 성장의 주추인 대전교구 진산성지는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권상연(야고보, 1751~1791) 복자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 복자가 나고 자란 곳이자, 그들의 유해 일부가 안치돼 있는 곳이다.
대전교구는 지난 5월 27일 성지 새 성당 봉헌식과 함께 전주교구로부터 세 복자의 유해 일부를 받아 안치했고, 동시에 순례길도 개방했다. 이를 위해 대전 서구청과 충남 금산군은 한국의 산티아고를 조성한다는 취지 아래, 지난해 12월 업무협약을 맺고 장태산 자연휴양림부터 진산성지까지 총 6.3㎞에 이르는 숲길을 정비했다. 뜨거운 여름, 가장 최근 조성된 한국 교회 신앙의 근원지 진산성지 순례길을 걸으며 신앙의 뿌리를 느껴봤다.
첫 순교자의 숨결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윤지충, 권상연 복자가 순교하기 전 증언한 내용이다.
진사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총명했던 윤지충은 신앙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하지만 큰 난관이 있었다. 효를 중시하던 조선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그때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전달했다. 윤지충은 주저하지 않고 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집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이후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사망하자 하느님 뜻을 따르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제사는 드리지 않았다.
이는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이념인 성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의 윤리 강령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패륜적인 행위였다. 이 일로 이들은 12월 8일 전주풍남문(현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됐고, 한국 교회의 첫 순교자로 기록됐다. 이 일이 신해박해, 진산 사건이다. 진산 사건이 일어나고 10년 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도 능지처참으로 순교했다.
진산은 본래 군이었지만, 이 사건 후 5년간 현으로 강등됐다.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고 한 테르툴리아누스 교부의 말처럼, 피로 신앙을 증거한 신해박해 이후 신앙공동체는 오히려 더 널리 퍼졌다.
진산 신앙공동체는 두 복자의 순교 이후 잠시 위기를 겪었지만, 신앙 여정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박해를 피해 진산으로 모여든 신자들은 교우촌을 형성했다. 진산은 고산지방 신자들과의 교류 안에서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오는 신자들을 통해 힘을 얻으며 계속해서 성장해갔다.
그리고 당시 신자들이 교류하던 그 길은 200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 크게 성장한 한국 교회 신자들이 신앙 선조들을 기억하며 신앙을 다지는 성지이자 순례길로 거듭났다.
울창한 푸른 숲길
순례길의 시작점은 대전 서구 장안동에 위치한 장태산 자연휴양림이다. 성지까지는 6.3㎞로 그리 긴 구간은 아니다. 산을 하나 넘는 순례길을 따라 성지에 다다르면 지역이 충남으로 바뀐다. 그러나 결코 단순한 둘레길이나 산책로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느끼는, 말 그대로 순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푸른 숲길이 주는 아름다움이 백미다. 자연이 주는 광활한 풍광은 덤이다. 장태산 휴양림은 최초의 사유림이자 민간자연휴양림으로, 대전 팔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자연 상태의 잡목 숲을 배경으로 평지에 고유 수종인 밤나무, 잣나무, 은행나무 등 유실수를 계획적으로 조림했고, 특히 광활하게 펼쳐진 메타세쿼이아가 장관이다. 초입에서 이를 모두 만끽할 수 있다.
성지까지의 순례길은 주차장에서부터 군데군데 표지판이 안내해주고 있기에 헤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3㎞ 정도 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성지순례길 유래비가 나온다. 본격적으로 순례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입구부터 울창한 산길로 이뤄져 있고, 이정표가 순례길을 알려준다. 다소 가파른 곳에는 로프가 설치돼 있어 안전하게 오를 수 있다. 평상과 의자도 여러 군데 마련돼 있어 잠시 쉬어가는 여유도 즐길 수 있다.
대전과 금산의 경계 마근대미재를 지나면 주변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곧이어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평탄한 산길을 걷다 보면 진산성지의 새 성당 부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고향을 방문해 어머니 품에 안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삶 담은 성지
진산성지의 중심은 어머니다. 성지에서 가장 높은 곳 한가운데 설치된 순교자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윤지충·윤지헌 복자의 어머니인 안동 권씨가 두 아들과 조카 권상연 복자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 안에 성모님의 삶이 담겨있듯 복자들의 순교 정신 안에 어머니의 신앙이 담겨 있다. 성지의 넓은 마당 한가운데 있는 피에타상은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건물은 2021년 복자들의 유해가 발굴된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순교자 무덤 배치 형태를 따랐다. 성전은 왼편 윤지충 복자 묘소 자리에, 전시실은 오른쪽 권상연 복자 묘소 자리에, 강의동은 전시실 아래 윤지헌 복자 묘소 자리에 마련됐다.
마당에는 십자가의 길이 남쪽과 북쪽에 각각 7처씩 세워졌다. 성전에는 15처를 의미하는 부활하신 예수님 상이 설치돼 연결성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제대를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세 복자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성지 어느 곳이든 거룩한 분위기와 복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